[해직언론인 이야기] 쪼잔하게 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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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 녀석이 느닷없이 묻는다.

“아빠, 학교에 낼 서류에 아빠 직업 써야 되는데 뭐라고 쓸까?”

“음… 언론인이지.”

“지금은 언론인 아니잖아? 백수라고 쓸까? 히히.”

옆에서 듣던 아내가 아들의 농담에 깜짝 놀라 정색하고 나무란다.

“아빠를 놀리면 어떡해? 그냥 언론인이라고 쓰면 돼. 해직 언론인도 언론인이야.”

아내는 그러면서 남편의 눈치를 슬쩍 살핀다.

“여보, 그냥 회사원이라고 적을까? 그게 무난할 것 같기도 한데.”

“아무렇게나 적으면 어때. 요즘 그런 것 선생님들이 신경이나 쓰나?”

난 짐짓 대범한 척 신문을 펴든다. 활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가슴 한켠이 살짝 저며온다. 아들아, 아빠는 어느새 네가 무심코 던진 돌에 맞고 상처받는 개구리가 되었구나.

 

에피소드 2

후배들과 오랜만에 만나 점심을 했다. 이런저런 회사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얄미운 놈들 뒷담화도 실컷 했더니 나름 유쾌해진다. 늘 하던 것처럼 계산대에서 지갑을 꺼낸다. 3만 6천원? 얼마 안 나왔네. 그 때,

“선배, 제가 낼게요.”

연조가 한참이나 어린 후배 한 녀석이 부득부득 계산한다고 우긴다. 계산대 앞에서 실랑이 몇 번 하다가 못이기는 척 도로 지갑을 넣고 호기롭게 말한다.

“그러면 커피는 내가 살게. 알았지?”

그런데 커피숍에서는 다른 후배 녀석이 슬쩍 먼저 계산해 버린다. 난 짐짓 화난 척 한다.

“야, 너희들 정말 나 쪽팔리게 할 거야?”

“선배, 오버하시는 거 아니에요? 가끔 저희가 낼 수도 있죠.”

“그런가? 그럼 담 번에 맛있는 것 다시 먹자. 그 땐 꼭 내가 낸다. 아무튼 잘 먹었다.”

머쓱해져서 금세 꼬리를 내려 버렸다.

해고된 선배 얄팍한 주머니 걱정하면서도 행여 자존심 상할까 배려하는 후배들, 당연히 고맙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왠지 가볍지는 않다. 자꾸 신경이 쓰인다. 왜 이렇게 내가 민감해졌을까. 이러다 진짜 우울증이라도 걸리는 거 아냐?

 

회사 안 가니 정말 시간 잘 간다. 벌써 8개월이 넘어섰다. 이제는 해직 생활에 적응 단계를 넘어서 무감각해질 법도 한데, 가끔씩 쓸데없이 예민하게 굴고 남들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그럴 때마다 버릇처럼 스스로 되뇌는 말이 있다. ‘쪼잔해지지 말자. 조급해지지 말자. 그러면 지는 거다.’

 

그래서 시작한 취미가 공방이다. 처음엔 재미로 소품 가구나 만들어 볼까 손을 댔는데 점점 판이 커져 버렸다. 나무를 자르고, 구멍 내고, 대패질하고, 사포질하다 보면 한나절이 훌쩍 간다. 어떨 땐 끼니도 잊는다. 식탁, 개다리소반, 아이들 책꽂이, 와인 진열장까지 만들었다가, 요즘은 예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원목 스피커 자작에 흠뻑 빠져있다. 인터넷을 뒤지고, 전문 동호회 고수들에게 자문을 구해가며 한 달이나 걸려 제법 그럴 듯한 대형 스피커를 완성했다. 소리도 썩 괜찮다. 무엇보다 내 스스로 고민해서 창의적으로 디자인하고 땀 흘려 작품을 완성해 가는 느낌이 아주 즐겁다. 아내도 작품이 멋있다며 칭찬해 준다. 이렇게 된 김에 아예 공방이나 차려서 인생 2막을 시작해 볼까 나름 행복한 고민도 해 본다. 어쩌면 이게 내 천직일지도 몰라. 날 자른 그 사람이 오히려 내 인생에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게 아닐까?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이 해임됐다는 뉴스가 날아들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별 일 없다고 잘난 척 제멋대로 칼 휘두르다가 기어이 역풍 맞고 잘렸단다. 참 허무하기도 하다. 그렇게 한 방에 날아갈 걸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그렇게 후배들을 못 살게 굴었을까? 해임안 처리를 앞두고 열린 소명 절차에서 그 양반은 펑펑 눈물을 흘리며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작년 6월, 날 해고하기 위해 열린 인사위원회에서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이유나 알고 잘리겠다.”며 항변하던 일이 생각난다. 내가 존경했고, 나를 아꼈다고 믿었던 어느 선배가 인사위원석에 앉아 애써 내 눈길을 피하며 천장만 바라보던 모습.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그래도 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울면 쪼잔해 보일까봐. 함께 해고됐던 선후배들 누구도 눈물 보인 사람 없었다. 모두들 당당하게 칼을 맞았고 대범하게 대응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후배들의 목을 쳤던 인간이 자신의 단두대 앞에서는 제발 살려달라며 펑펑 눈물을 쏟았다니. 에이, 쪼잔한 사람 같으니라고.

 

곧 새 사장을 선출한다고 한다. 누가 사장이 될지 모르겠지만 큰 기대는 안하기로 했다. 기대를 많이 하면 실망도 큰 법. 결과에 실망하고 좌절하면 사람이 또 쪼잔해질 것 아닌가.

 

오늘도 난 스스로 다짐한다. 매사에 당당하자. 남들 시선 의식하지도 말고 상처받지도 마. 대범하게 지내야 해. 새 사장이 왔는데도 복직 안 되면 어쩌냐고? 제2의 인생을 개척하면 되지 뭘 걱정해? 쪼잔하게 살지 말자. 그게 해직 언론인이 지켜야 할 첫 번째 덕목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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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제 기자가 제작해 <뉴스타파>에 기증한 스피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