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직언론인 이야기] 만일 내가 다시 MBC 기자가 된다면

 MBC 박성호 기자회장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로 시작해서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로 끝맺는 다이애너 루먼스의 잘 알려진 글귀가 우리 집 냉장고에 몇 년째 붙어 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아내가 베껴 적은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마도 첫째 아이를 어느 정도 키워놓은 상태에서 품었을 성찰적 고백이자 둘째를 갖게 된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희구(希求)와 선언을 담았을 성 싶다. 그런데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이라는 이 가언명제(假言命題)를 나의 복직을 가정해 만일 내가 다시 MBC 기자가 된다면하는 식으로 대체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떠올랐고, 장난기 반, 진지함 반으로 실행에 옮겼다.

만일 내가 다시 MBC 기자가 된다면

후배의 이의 제기는 올바른 뉴스 전달을 위한 노력으로 여기고

대든다’, ‘나댄다라고 곡해하지 않으리라.

 

미안. 내가 잘못 생각했네.’라고 인정할 땐 인정하고

내 잘못을 알면서도 옳은 것처럼 행동해 문제를 만들지 않으리라.


완벽한 후배를 기대하기 보다는 저마다의 장점을 파악하리라.

가르치고 지적만 하지 않고 그들을 사랑하고 신뢰하리라.

꽃마다 피는 계절이 다 다르니 성과에 조급해 하지 말라고 일러 주리라.


퇴계의 사문수간(師門手簡)을 본받아 후배들과 늘 소통하되

해직기자였다는 과거를 팔며 미래를 억압하지 않으리라.


만일 내가 복직된다면

후배의 훌륭한 보도 내용과 취재 노력에 존경을 표시하고

모자란 신중함과 넘치는 욕심도 꼭 지적해 주리라.


기사를 고칠 때는 의심 많은 선배가 되리라.

아는 것은 적고 판단은 많은 기자를 꾸짖고

룰에 밝고 공정한 태도를 가진, 좋은 심판 같은 기자를 아끼리라.


뉴스의 공정성은 외압이나 조직 논리에도 좌우되지만

기자 개인의 자질, 자기검열로도 공범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리라.


나 혼자 말이 많으면 후배들은 침묵하게 된다는 걸 명심하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며 내 확신과 신념을 강요하지 않으리라.

이상은 후배 기자들을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겠다는 반성적 독백이자 희망과 다짐을 늘어놓은 셈인데, 부장과 국장 등 간부들은 또 어떻게 대해야 옳은 것인지에 대한 생각도 따로 추려봤다.

만일 내가 다시 MBC 기자가 된다면

선배의 잘못을 보고도 고치도록 직간(直諫)하지 않는

직무유기는 범하지 않으리라.


민감한 이슈를 피하고 권력에 불편한 뉴스를 누락하는 것은

기사 판단의 재량이 아니라 알 권리 침해 범죄라고 외치리라.


정부, 정당의 목표와 방송사의 목표가 같지 않은 만큼

그들의 감정을 선배들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하리라.


국장이 정의(正義)를 최고의 가치로 세우면 보도국도 그럴 것이요,

국장이 이익과 시청률을 좇으면 밑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말씀드리리라.


만일 내가 복직된다면

고용, 주택, 보건 등 중산층과 노동자들의 관심사는 더 다루고

여성, 학생, 다문화 가정이 덜 다뤄지지 않도록 설득하리라.


시청자가 원하는 뉴스를 운운하려면

시청률이나 가족 몇 사람의 의견을 팔지 말고

불편부당성, 신뢰도까지 감안한 질적 평가도 고려하라고 건의하리라.


기자회의 항거 대상이 된 선배들께는

편집권은 권력과 자본의 부당한 간섭을 물리치는 권리이지

시민은 물론 기자들의 정당한 비판까지 묵살하는 권리가 아님을 상기시키리라.

BBC는 양적 평가로서의 시청률 조사가 도입되기 전인 1936년부터 appreciation index(감상지수 측정)를 통해 불편부당성, 신뢰도, 방송 후 영향력 등의 질적 평가로 시청자들의 충족도를 관찰했다.

물론 그 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다만 아이를 다시 키우게 된 것처럼 복직도 언젠가는 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그 시점을 예측하는 것조차 불경스럽다고 할까 사치스러운 생각이 든다. 동아투위 선배들은 38년째 해직기자 신분이고, YTN 해직기자들은 지난 5일로 해고 4년을 맞았다. 그들의 해직 4주년 행사에 갔다 오는 길에, 이제 기껏 해고 130일을 넘긴 나보다는 노종면, 조승호 선배가 먼저 복직돼 밝게 웃는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