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의 5.18 목격자’ 눈을 감다

1980년 5월 19일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이하 직함 생략)의 ‘전설’은 이날 시작된다. 독일 공영방송 ARD-NDR의 한국과 일본 특파원을 겸하던 그는 1980년 5월 19일 아침, 일본에서 ‘광주’ 소식을 듣는다. “순간 함부르크 본사에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내가 취재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곧장 김포공항으로 날아온 그는 외신 취재 신청을 해야 했던 해외홍보원(KOIO)을 거치지 않고 택시기사 김사복 씨와 함께 광주 잠입을 시도했다. 길목을 계엄군이 가로막았다. “나는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우리 일행의 책임자를 잃고 그를 찾으러 다닌다는 식으로 그럴 듯하게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다.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우리는 그 어려운 관문을 마침내 통과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그는 저지선 안쪽에서, 때로는 시위대 트럭에 올라타 많은 영상을 촬영했다. 그의 이름은 모르더라도 그가 찍은 영상은 다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외신 기자를 반기는 군중, 무장한 시민군과 집회를 여는 시민, 이후 머리에 총상을 입고 시신으로 발견된 청년의 시위 장면, 관으로 가득한 병원과 유족의 오열….
이제 필름을 반출하는 게 마지막이자 가장 결정적인 관문이었다.
“언론인이 수집한 자료를 방송으로 내보내지 않고 머릿속에 넣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나?”
“나는 필름을 큰 금속 캔 속에 포장해 과자 더미 속에 숨겼다. 또 필름을 단단한 금속 포장과 파란색 리본으로 화려하게 꾸며 선물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 (일본행) 비행기에 탑승한 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마침내 내 필름 릴의 무사함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외딴 섬’ 광주의 그림이 철벽을 뚫고 외부세계로 나간 순간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필름을 넘기고 다시 광주로 향했다.
마침내 5월 22일 오후 8시, 독일 ARD 전파를 탔다.
“한국의 광주와 그 주변 지역까지 확대된 민중 봉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영상은 유로비전과 미국 방송에도 제공됐다. 그의 나이 만 43세였다.

1980년 9월과 그 후
힌츠페터는 1980년 5월에 촬영한 영상으로 그해 9월, 45분짜리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한국>을 제작했다. 이른바 ‘광주 비디오’의 오리지널 버전이다. 공지영 씨는 소설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대학 때 본 필름, 우리가 성만이네 자취방에서 보면서 함께 붙들고 울었던 그 필름. J가 내 건너 건너편에 앉아서 옆에 앉은 여학생의 옷자락을, 뭐 하러 붙드는지도 모르고 붙들고 뚝뚝 눈물을 흘리던 그 필름, 결국 1987년, 이한열이를 죽이고 우리들로 하여금 시청 앞으로 뛰쳐나가 전두환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내게 했던 그 필름이 그렇게 태어나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걸 나도 그때 처음 알았지.”
그는 1986년 광화문 시위를 취재하다 목과 척추를 다쳤다. 2003년 KBS <일요스페셜: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가 그를 조명했다. 2003년 제2회 송건호언론상을, 2005년 한국카메라기자협회 특별상을 받았다. 2004년 심장병으로 쓰러졌을 때 광주에 묻히고 싶다고 밝혔고, 그의 머리카락과 손톱이 광주에 전달됐다.

2005년 4월 15일
나는 2005년 독일 취재 중 힌츠페터의 라츠부르크 자택을 찾은 적이 있다. 나 같은 평범한 기자가 이 글을 청탁받은 유일한 이유다. 투병 중이던 그는 한국 기자의 취재에 열심히 응했다. 송건호언론상 상패를 비롯해 한글이 새겨진 도자기 등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고, 많은 한국 관련 도서들도 꽂혀 있었다. 힌츠페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유의 의미를 생각할 때마다 광주를 떠올리게 된다. 광주 시민이 무엇을 이야기했고 무엇을 위해 죽어갔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한국의 민주화는 특정한 지도자가 아니라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는 시민의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 “남한과 북한이 통일을 이루고 번영하기 바란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한 모두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켜야 하고, 자유를 누리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공지영 씨 소설집 『별들의 들판』을 건넸다. 그 책에는 힌츠페터가 등장하는 소설 ‘귓가에 남은 음성’이 담겼다. 소설 내용을 전해 들은 그는 “한국에서 입은 부상과 지금 심장병은 사실 관련이 없는데 과장이 된 것 같다.”고도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이 늦어졌다. 그는 작은 자동차를 운전해 우리를 기차역까지 데려다주었다. 결국 다음 취재지였던 함부르크로 가는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약간의 수습이 필요했지만, 오히려 그 시간이 감사했다.

2016년 1월 25일
“5.18의 참상을 영상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가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016년에 다시 본 영상은 마치 머나먼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내전 같다. 불과 36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세상은 바뀌었지만 아직도 그가 ‘북한의 간첩’이라고 주장하는 글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그는 ‘현장 기록’의 힘을, ‘카메라의 힘’을 한국의 역사에 아로새겼다. ‘전설’이 됐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했다. 맞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운이 아무에게나 그냥 찾아가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는 운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운이 따를 수밖에 없는, 반드시 운이 따라야 하는 기자였다. 그의 명복을 빈다.


 

참고문헌
위르겐 힌츠펜터, ‘카메라에 담은 5.18 광주 현장’, 『5.18 특파원 리포트』 (한국기자협회, 풀빛, 1997년)
공지영, ‘귓가에 남은 음성’, 『별들의 들판』 (창비, 1997년)
KBS 일요스페셜,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 (2003년 5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