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삶] 평발 기자의 무모한 100km 도전기

64 꼭지

 

 

65 대회

‘특종왕’, ‘소리 없는 저격수’ 등 기자라면 한 번쯤 듣고 싶은 별명 대신 내게는 수습 시절부터 ‘폭주기관차’, ‘주사파’ 등 술과 관련된 애칭이 늘 따라다녔다. 문제는 나 자신이 꾸준히 별명에 걸맞은 행동을 해왔던 것. 21년 지기 아내의 타박에도 흔들리지 않는 결연한 내공까지 갖추게 됐다. 하지만 꽃중년을 넘기면서 숙취가 오래가고 필름이 자주 끊겼다. 위기는 기회! 수영장과 헬스장에 등록하고 운동에 매진했다. 결과는 작심 3주. 대안을 찾아야 했다.
고등학교까지 100m 육상 대표로 나설 정도로 단거리에는 자신 있던 내가 제일 싫어했던 게 걷기다. 산책이든 등산이든 빨리 갔다 오는 걸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동네 공원에서 팩트를 발견했다. 파워 워킹! 걷기와 달리기의 중간 단계랄 수 있는 이 방식으로 운동장을 대여섯 바퀴 돌자 등 뒤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걷기의 지루함을 달래려고 공원뿐 아니라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쏘다녔다. 출장을 갈 때도 운동화를 챙겨 시간 나는 대로 걸었다.
박지성의 ‘평발’보다 더 심한 평발에 마라톤이나 장거리 걷기는 쥐약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올 초 걸려온 친구의 느닷없는 전화 한 통화가 고정관념을 깼다. 광역수사대 경찰관인 친구 배준일이었다.
“100km 무박 걷기대회 등록해 놨으니까 같이 간다.”
전화는 바로 뚝 끊겼다.

대회 당일,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모두들 다리와 발에 테이핑을 하고 발바닥에 바셀린을 바르며 분주했다. 나와 친구는 멍하니 보고 있다가 인파에 휩쓸려 순식간에 사지로 몰렸다.
66 대회25km부터 정강이 바깥쪽 근육이 터질 듯 땅긴다. 고개는 또 왜 이리 많은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다리가 더 후들거린다.
27.1km 첫 체크포인트. 가볍게 먹으라는 말을 뒤로하고 평소보다 2배 많은 밥을 비웠다.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다시 전진.
39.3km 두 번째 체크포인트. 비가 거세지고 맞바람까지 몰아친다. 푹 젖은 등산화, 물집이 잡혀 만신창이가 된 발. “준일아, 첫 출전치곤 최선을 다했다. 고마 가자.”, “니 혼자 가라. 난 더 가볼란다.” 야속한 XX.
49km 체크포인트는 내가 걸은 게 아니고 다리만 움직였다. 간격은 점점 벌어져 친구와 난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걸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를 다시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후회가 엄습했다. 회송 버스는 사라졌고 샛길도 없는 ‘진퇴양난’.
새벽녘에 도착한 75.1km 지점. 그저 눕고만 싶었다. 하지만 30분 전 도착하셨다는 내 아버님 또래의 건각을 보고 정신이 바짝 났다. 칠순을 넘기신 그분은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동료 어르신 그룹과 함께 대용량 막걸리를 드시고 계셨다. 사발에 그득히 따라주신 막걸리를 들이켜면서 판단력은 흐려지고 정신은 몽롱했다. “그래도 내 발들아, 조금만 더…. 25km만 더 수고하자.” 원주 간현역부터 이어진 마의 4km 언덕. 쉬고 또 쉬어도 발바닥과 종아리, 허벅지 통증은 가시질 않았다. 십 리를 걷는 동안 지금까지 배운 모든 욕과 저주를 쏟아냈다.
90, 91… 99km까지. 사표를 품고 사는 샐러리맨처럼 포기하고 싶었지만 결국 해냈다. 23시간이 오롯이 흘렀다. 웃음도 눈물도 나지 않았다. 뭔가 아쉽고 깊은 허탈감만 몰려왔다.
100km를 걷는 동안 나를 가장 괴롭힌 건 고통도 아니고 습한 날씨도 아니었다. 포기를 종용하던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혼자선 엄두도 못 냈을 도전을 열어주고 채찍질하던 친구 배준일이 없었으면 또 불가능한 일이었다. 먼 길을 갈 땐 눈썹도 뽑아야 한다는 비움의 지혜도 얻었다. 현재 나는 인생의 51km쯤을 걷고 있을까.
아들의 뜻과 상관없이 그 녀석을 데리고 산티아고 29박 30일 순례를 떠날 생각마저 갖게 됐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향내를 아들의 눈높이로, 글로써 남기고 싶다는 욕심도. 오래 걷기가 준 건강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