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노트] ‘청탁 전화 수신자’의 자세

‘청탁 전화 수신자’의 자세

 

청와대 홍보수석이 KBS 보도국장에게 청탁하는 통화 내용을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홍보수석이 자기 일에 참열심’이라는 평가를 내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읍소와 으름장 사이를 오가는 능란함과, 방송사 뉴스제작의 생리에 정통한 듯하면서도 뉴스 가치와 저널리즘의 원칙은 무시하는 뚝심과, 구조에 나선 정부 조직의 사기를 걱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하필 그날 방송을 보신 ‘님’의 심기 불편에 당황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우직함을, 누군가는 높이 살것 같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집권세력이 방송을 대하는 태도를 지켜봐온데 따른 우려였고,
그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보도국장의 전화 응대가 녹음을 의식하지 않은 평소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의문도 가졌습니다. “하여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볼게요”는 녹음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이, 선배. 걱정 마세요. 아침뉴스부터는 빼드릴게’가 아니었을지, 상상해 봤습니다. 그리고 다른 공영방송사 보도국장은 어떤 태도로 응대했을지, 그 방송사는 워낙 ‘잘 하고 있어서’ 전화를 받을 필요조차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송신자의 발언이 적절한가 여부는 방송기자 입장에서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합니다. 지금 같은 시대에도 이런 압력이 행해진다니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제도를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다행입니다. 다만 기자 입장에서 더 관심을 갖게되는 것은 압력 전화에 대처하는 수신자의 자세입니다.
이런 대목에서 전 BBC 사장 그렉 다이크의 자서전을 종종 인용합니다. 2003년 3월 이라크전 당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BBC 보도가 전쟁 반대로 기울었다며 ‘서신을 통해’ 압력을 가했습니다. 다이크 사장은 답장에서 ‘현 상황에서 총리의 언론담당 보좌관들이과연 BBC 보도에 대해 조언할 자격이 있는가? 정부와 BBC가 이 사회에서 맡은 역할은서로 다르다. 총리의 견해에 찬동하지 않는 기사 때문에 공영방송 전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되받았습니다.
사실 제도를 바꿔도 ‘압력 송신자’의 전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통화 내용이 지금보다 덜 격정적이고 더 세련되지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압력 수신자’의 태도는 중요해집니다. 다시 BBC의 국제뉴스 책임자 존 심슨의 논평을 인용합니다. “집권당이 노동당이든 보수당이든 정부는 전쟁이 날 때마다 공식적인 입장을 지지하라고 BBC를 위협했다. 하지만 BBC는 매번 저항했다. 정부도 일반 국민처럼 BBC에 압력을 가할 권리는 갖고 있지만, BBC가 압력에 굴복하면 문제가 된다.”

방송이 진공상태나 무균실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압력이 당연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압력을 대하는 태도는 사후 규탄으로 정당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저항은 당대에 이뤄질 때 유의미하겠지요. 2012년 1월 MBC 기자들은 15건의 보도 누락과 축소 사례를 공개하며 제작거부에 들어갔습니다. 이어 KBS 기자들도 제작거부 대열에 동참하며 공영언론의 총파업으로 확대됐습니다. 당시 방송기자들은 단순히 사장, 보도 책임자들이라는 내적 위계 구조만이 아니라 외부에서 입력된 압력의 위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지금 방송기자들은 녹취되지 않은 청탁과 거부당하지 않은 압력을 새삼 다시 떠올리고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