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_부정청탁 금지법 이후 ⑤_현장보고 정치부_SBS 이경원 기자 (정치부)

 

장면 1
국회 관계자와의 점심 약속 한 시간 전. 문자가 왔습니다. “오늘 점심 어떻게 하죠?” 계산이 걱정인 모양입니다. “직무 관련성이 있으면 무조건 각자 계산해야 한다고 해서…”라며 못내 불편해합니다. 3만 원까지는 괜찮다고 하는데, 누구는 또 어쩔 때는 안 된다고 합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계산대 앞에서 줄을 서서 한 명 한 명 카드를 긁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습니다.

장면 2
다른 국회 관계자와의 점심 자리. 이번엔 기자가 먼저 “계산 각자 하시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정 없게 왜 그래요? 3만 원만 넘지 않으면 괜찮아요. 지금 1인당 3만 원 안 넘잖아요?” 그러고는 주변을 뿌리치더니 카드를 긁습니다. 이런 밥자리가 3만 원 규정에 맞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자들은 뒤에서 “정말 괜찮을까?” 수군거렸습니다.

장면 3
국회 대관 업무를 하는 기업의 국회 출입 직원과 저녁 약속. 점심부터 연락이 옵니다. “제가 알아보니, 우리는 직무 관련성이 없어서 누가 밥값을 내도 상관없다고 하네요. 3만 원이 넘어도 된다네요. 부담 없이 만나시죠.” 일찌감치 권익위에 유권 해석을 부탁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영 불안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관 직원’과 기자가 직무 연관성이 없다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진 않습니다.
공직자가 넘치는 여의도는 김영란 법 때문에 혼란스럽습니다. 사실 감이 잘 안 잡힙니다. 누구는 이러면 김영란 법 위반이라고 하고, 누구는 아니라고 합니다. “에라 모르겠다.”며 카드를 긁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가 망설입니다. 예전처럼 기자님들 모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더치페이 하기에는 정이 없습니다. 누구는 성장통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엎질러진 물, 뭔가 나아지는 게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윤리적 금치산자’가 된 기자들
그런데, 어쩌다 기자들은 밥값이나 경조사비 몇 만 원까지 통제를 받을 정도로 도덕적 건강성을 의심받게 됐을까요. 사실 김영란 법은 규제를 넘어 처벌에 가깝습니다. 기자들은 수십 년 지기와의 식사 자리까지 통제받아야 할 만큼 일상을 간섭받아야 합니다. 홍보실에 있는 친한 대학 동창과의 술자리마저 계산을 걱정해야 하는 제 모습에 왠지 윤리적 금치산자가 된 것 같아 씁쓸합니다.
사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몇 만 원의 소비 행태까지 법이 통제하는 건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위헌이냐 합헌이냐는 식의 법리적 근거나, 경제가 위축될 거란 자본주의적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법 하나로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법 만능주의는 지금껏 비판의 대상이 돼 왔습니다. 법적 판단을 과도하게 신뢰할 경우, 문제 해결 과정과 과정 사이 치열한 토론과 문화적 고민은 기회비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은 누구의 말처럼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합니다. 언론이 지금 권익위를 비판하는 이유는 이런 법 만능주의가 중심에 있습니다.

우리는 혼란의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그런데, 기자들도 이런 혼란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 기사의 화법은 어땠나요. 뭐만 있어도 ‘처벌 강화’를 외쳤습니다. 대안이 확실해야 야마(기사의 주제)가 뚜렷하다는 게이트 키퍼의 주문 아래, 우리 기사는 항상 그랬습니다. 김영란 법 공론화 과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김영란 법의 필요성을 압박했던 건 기자들이었습니다. 제가 국회를 출입하기 시작한 게 2014년 12월, 김영란 법이 국회에서 한창 논의되고 있을 때였는데, 당시 나온 기사들은 이랬습니다.

“해 넘긴 김영란 법, 국회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
“김영란 법, 국회는 처리 의지 있나”
“김영란 법 무산시킬 핑계 찾고 있는 반개혁 국회”
“국민정서보다 국회정서…후퇴하는 김영란 법”
“김영란 법, 4년 째 국회 문턱 못 넘다니”

그리고 이듬해, 언론인도 법의 대상에 포함된 채 국회를 통과하자 기자들은 화들짝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제도 변화, 규제 강화를 자신의 일상에 끼워 맞추며 계산기를 두들겨보고는 ‘아뿔싸, 이게 간단치 않구나.’라며 땅을 쳤습니다. 부패를 막자고, 처벌 강화하라고 외쳤던 기자들은 문제는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문화였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기사는 영혼 없이 관성에 의존했습니다. 철없는 글쓰기였습니다.
김영란 법이 공론화되는 과정 속, 언론은 공식처럼 ‘법 강화’를 외쳤습니다. 현실보다는 ‘명확한 야마’를 강조했습니다. 법 강화보다 토론을, 결과적으로 문화의 힘이 중요하다는 화법을 우리 게이트 키퍼들은 견뎌내질 못 했습니다. “그래서 어쩌자고? 야마가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이렇게 면박을 줬고, 급기야 가장 마지막 문장에는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는 말을 억지로 꾸겨 넣었습니다. 그게 편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김영란 법이 옳은지 그른지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김영란 법이 통과되기 전과 후의 기사들을 쭉 읽어보면서, 기자들이 사회 현상을 도식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는지 ‘열공’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기자들이 처한 상황은 사회에 대한 고민 없는 기사 쓰기의 대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봐도 기자들이 제 무덤을 판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