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_부정청탁 금지법 이후 ②_현장보고 사회부_YTN 이승윤 기자 (사회부 행정팀)

미국에서 예습(?)한 김영란법
지난 2012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세관을 취재하러 갔다. 깐깐한 인상의 세관 홍보 담당자가 점심시간이 되자 자기가 잘 가는 단골집이 있다며 촬영기자 선배와 나를 샌드위치 식당으로 안내했다. 오전 내내 꼼꼼하게 미국 세관의 검색 작업을 안내하고 전문가 인터뷰를 조율하느라 고생이 많았던 그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내가 밥을 사겠다고 말했는데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No!”를 외친다. 외부인과의 식사 때 더치페이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정인 만큼 자기가 내게 밥을 얻어먹을 수도 없고, 자기가 내게 밥을 사줄 수도 없단다.
지난해 미국 대학에서 연수를 할 때 미국인 교수님 주최로 종강 맥주 파티가 있어서 미국인 대학원생들과 맥주를 마셨는데 갑자기 신용카드를 걷는다. 당연히(?) 교수님이 술을 사는 줄 알았는데 더치페이였다. 이후 연수 기간 내내 남에게 밥 얻어먹는 미안함, 남에게 밥 사주는 부담감을 덜고 더치페이로 지내보니 참 편했던 것 같다.
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영란법으로 알려진 청탁 금지법을 갑작스럽게 만나게 됐지만 미국에서 생활화된 더치페이 덕분인지 그렇게 어색한 느낌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김영란법 시행 전 기업이 후원하는 언론인 해외연수의 막차를 타고 온 셈이 됐다.

0’시와 함께 찾아온 김영란법
역사적인 김영란법 시행을 기념해(?) 김영란법 시행 전날 모 출입처 주최로 회식이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한 뒤 2차로 치킨집에서 소맥 폭탄주를 타먹는데 아뿔싸! 0시가 넘었다. 일행 모두 지갑을 꺼내 더치페이를 하려는데 모 기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오늘 술값은 제가 냈어요.” 김영란법이 현실이 됐다는 걸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그다음 주에 강원도 원주로 김영란법 시행 이후 첫 지방 출장을 갔다. 보도자료를 낸 모 기관 직원들과 같이 식사는 했지만 밥값은 언론사별로, 기관별로 따로 냈다. 하지만 취재를 도와준 모 기관과의 관계나 취재의 품질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

해외 출장 취소
반면, 해외 출장엔 확실히 큰 변화가 찾아왔다. 김영란법의 여파로 환경부 출입 기자단의 모로코 출장이 취소됐다. 환경부 출입 기자단 간사의 공지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기후변화총회 출장 관련입니다. 당초 권익위 대변인의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고 출장을 진행했으나 권익위 실무진에서 끝내 “어렵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환경부가 주최자면 괜찮겠지만 기후변화총회가 모로코에서 열리고 해당 국가에서 행사 준비를 하기 때문에 환경부를 주최자로 볼 수 없다는 겁니다.
‘기후변화총회가 당사국 총회이기 때문에 모두가 주최자고 주인이다’라는 반박을 했지만 권익위 실무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출장을 강행하는 것은 오히려 무리일 것 같습니다. 가더라도 향후 신고나 재판 등도 고려해야 할 것 같고요.”

‘저녁이 있는 삶’을 되찾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확실히 취재원과의 약속이 줄었다. 그래도 아예 없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3만 원의 규칙은 칼같이 지켜지고 있다. 확실히 점심은 여유가 있는데 저녁은 술을 곁들이다 보면 1인당 3만 원이 넘을까 초조해진다. 최근 한 모임에선 취재와 상관이 없는 전 출입처 지인들과 나까지 4명이서 삼겹살에 소맥 폭탄주를 먹는데 딱 11만 8천 원까지 먹고 자리가 끝나서 홀가분했다. 이젠 술값을 머릿속에 염두에 두고 마시다 보니 술자리 분위기도 차분해진 것 같다.
역시 취재와 상관없는 또 다른 전 출입처 지인들과의 만남에서도 3만 원의 규칙은 이어졌다. 덕분에 1차 장소는 고깃집에서 부대찌개 집으로, 2차 장소는 호프집에서 카페로 바뀌었다.
정말 사적인 관계인 고등학교 동창인 의사 친구 가족과 우리 가족이 함께 여행을 갈 때도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사립대 교수인 그 친구나 나나 김영란법 적용 대상이기 때문이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현금 대신 카드로 모든 계산을 일일이 나눠서 하며 증빙자료를 남겼다.
김영란법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8개월 된 우리 아기와 아내인 듯. 저녁이 9시 전엔 끝나니까 아기는 아빠 얼굴을 보고 잘 수 있게 됐고, 아내는 ‘저녁이 있는 삶’이 찾아온 것 같다며 기뻐한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다이어트
우리는 흔히 기자와 취재원 간의 관계는 가까이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고 한다. 그게 정답이란 걸 모두가 알면서도 그동안 기자와 취재원 사이에는 ‘불가원’만 강조됐던 것 같다. 이제 ‘불가근’의 원칙이 청탁 금지법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자리 잡을 때가 됐다. 우리 사회가 청탁이란 거품을 빼기 위한 다이어트에 돌입한 셈인데 부디 요요 현상에 아랑곳없이 목표를 달성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