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_부정청탁 금지법 이후 ①_기자들이여, 아래로 내려오라_KBS 용태영 기자 (보도국 디지털 에디터)

 

어이없는 폐습… 지금은?
한때 촌지가 있었다. 취재하러 나가면 돈 봉투를 받았다. 특히 민원성 취재일수록 더했다. 이뿐인가? 명절이 다가오면 기자실 간사가 관련 업체나 기관에 전화했다. 돈 가져오라는 거였다. 기자실에서 받은 돈을 1/n로 나눠 기자들에게 돌렸다. 불과 20여 년 전 풍경이다. ‘세상에 어찌 그럴 수가?’ 그땐 그랬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이’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우리는 그런 ‘어이없는 일’로부터 벗어났나? 20년 뒤 후배들은 이런 글을 쓸지도 모른다. ‘한때 언론계에 접대 골프가 있었다. 기자는 골프를 공짜로 쳤다. 값비싼 식사와 술을 공짜로 먹었다. 명절이면 수십만 원짜리 선물을 받았다. 어이없는 시절이었다.’
세상은 변한다. 세상의 윤리가 변하고, 언론인에게 요구하는 도덕성의 수준도 변한다. 물론 항상 좋은 방향으로만 변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김영란법’이 추구하는 변화는 바람직해 보인다. 접대와 유착으로 얼룩진 언론의 고질병을 고칠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귀족 문화’에 젖은 기자들이 조금이나마 ‘평민’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귀족’이 된 기자들… 왜?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 입사 시험 때 언론의 사명을 물으면 당연히 답했을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권력이냐고 물으면,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가장 중요한 감시 대상이라고 꼽았을 것이다. 그렇게 입사한 기자들이 지금은 어떤가? 10년, 20년이 지난 지금, 그 기자들이 권력을 감시하는가? 아니면 권력을 대변하는가? 권력과 맞서는가? 아니면 권력의 편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기자들이 ‘권력’과 ‘국익’의 의미를 혼동하면서 권력 대변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인가? 비판과 감시는 어디로 갔나?
그 원인 중의 하나가 잘못된 ‘접대 문화’라고 본다. 기자들과 친해지려는 이, 누구인가? 정치 권력이고 경제 권력이다. 어떻게 친해지는가? 밥 사고, 술 사고, 선물하고, 골프 친다. 해외여행도 보내준다. 비싸고 귀한 접대일수록 효과는 좋다. 이렇게 기자들은 권력과 친해졌다. 권력과의 친분은 심지어 사내 인사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기자들은 접대를 통해 ‘귀족 문화’에 젖으면서 자신도 ‘귀족’이 되고 권력으로 변했다. ‘감시자’가 ‘대변인’이 됐다. 실제로 대표 뉴스 앵커를 하던 기자가 순식간에 청와대 대변인으로 변신한다. 일부 기자는 그런 기자를 부러워한다. 기자는 더 이상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권력의 설탕’이 됐다. 소금이 설탕이 됐으니 세상이 썩어가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 부패 지수가 왜 높은 것인지, 우리 책임도 크다.

‘귀족 놀이’에서 ‘평민 세상’으로
사회적 약자 보호? 역시 입사 시험 때는 너무도 당연했던 명제이다. 지금도 그런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권력’이 약자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른바 ‘개, 돼지’로 묘사되는 ‘무지렁이 다수’로부터 부당하게 비난받는 ‘소수 권력’이 억울해 보인다. ‘국익’의 이름으로 권력을 보호해야 한다. ‘김영란법’ 때문에 ‘다수의 골프업체’가 위기를 겪는 것도 마음 아프다. 그래서 ‘골프를 쳐서 내수를 살리자’는 윗분의 말이 살갑게 다가온다. ‘다수 고급 식당’의 어려움이 ‘경제 위기’로 다가온다. 값싼 대중 식당이 받을 수 있는 반사이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런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어느새 ‘권력’의 편에 맞춰진 것 아닌가? ‘가진 자’와 친해지면서 ‘가진 자’의 일부로 변한 것 아닌가?
‘김영란법’은 그런 권력과의 ‘친해짐’을 견제하는 법이다. 권력만이 할 수 있는 ‘친해짐’의 수단, 즉 값비싼 식사와 선물, 골프 등을 원천봉쇄하는 장치다. 기자들을 ‘귀족 놀이’에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스스로 ‘귀족화’되는 것을 막는 예방주사다. 세상에 어찌 식사가 비싼 요리만 있고, 운동은 비싼 골프만 있겠는가?
기자는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다. ‘친해짐’은 내밀한 취재를 돕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싼 접대는 소수의 권력만이 제공할 수 있는 은밀하고, 좁은 통로이다. 그런 좁은 길을 막고 모두가 당당할 수 있는 ‘넓은 길’을 열자는 것이 법의 취지이다. 당당하게 살자. 조금 덜 누리면 마음이 당당하다. 그러다 보면 우리에게 물들었던 단맛이 서서히 빠지고 짠맛은 조금이나마 더해질 것이다.
기자들이여 아래로 내려오라. 값싼 밥도 많고, 돈 안 드는 운동도 많다. ‘3, 5, 10’ 아래서도 충분히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다. 그렇게 식사하고, 운동하는 이는 누구인가? 바로 ‘평민’이고 ‘약자’ 아닌가? ‘평민 놀이’에 젖어 ‘평민’이 되고 ‘약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비정규직의 고통이 새삼 눈에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흙수저’가 말하는 ‘헬조선’의 의미가 조금이나마 살갑게 다가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