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②] 대통령 탄핵:언론은 어떻게 ‘공범’이 됐나?_“월급 받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이미 공범”_MBC A기자

회상
‘MBC 화이팅!’ 모세의 기적으로 홍해가 갈라지듯 MBC 취재진이 나타나면 촛불 집회 참가자들은 아무리 좁은 곳이라도 길을 터 줬다. 덕분에 집회 대오 끝에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구급차 지나가듯 움직였다. 2008년 광화문 집회 때였다.
그리고…
2016년 겨울. 3차 촛불집회 취재를 위해 무대 앞에 섰다. 여기저기 야유의 소리가 들렸다. 눈총이 따갑지만 세월호 시국강연회를 취재하기 위해 REC 버튼을 눌렀다. 무대에 선 강연자가 MBC 욕만 20분 동안 했다. 도저히 사람들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뷰 파인더만 바라봤다.
4차 집회가 끝나고 행진이 시작됐다. 행진대오를 따라나섰다. 카메라를 메고 사다리에 올라 뷰 파인더를 응시하는 순간. 뒤에서 ‘MBC 꺼져’라는 말이 나온다. 그날 MBC는 야유로 인해 도저히 생방송을 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마이크에서 로고를 떼어냈다. 조명도 켜지 않았고, MBC 뉴스라는 멘트조차 하지 않았다. 그 뒤 집회부터는 옥상을 찾아다니며 생방송을 했다.
5차 집회에 100만이 모였다. 중계차에서 전화가 왔다. 야유가 너무 심해 광화문 인근에 차를 세워 둘 수가 없다고 했다. 뉴스 끝날 때까지만 버티고 사람들이 안 다니는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라고 했다. 송출을 위해 버스 세 정거장 가량을 뛰어가야 했다.
6차 집회.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광화문에 모였다. SNS에서 카메라에 MBC 로고를 A4 용지로 가리고 취재하는 사진이 올라왔다. 급히 상황을 파악하고 로고를 가리고 인터뷰를 한 VJ를 철수 시켰다. 뷰 파인더에 자꾸 손 피켓이 보인다. 누군가 따라다니면서 ‘MBC는 찍을 자격 없다’며 화면을 가리고 있었다. ‘박근혜 퇴진’을 외치던 집회 참가자들이 MBC를 불러댔다.

“MBC도 공범이다. 너희가 언론이냐?”
7차 집회. 탄핵 가결 이후 처음 맞은 집회라 참석 인원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또 100만이 넘었다. 본 집회가 끝난 뒤 카메라를 놓고 잠시 쉬었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일 시킨 오디오맨에게 미안해서 물이라도 사 오라고 지갑을 꺼냈다. 그때 누군가 팔꿈치로 툭 치며 비아냥거린다. “그러고 월급 받고 사니까 좋냐?”
8차 집회가 자정이 다 되어 겨우 마무리되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후배를 만났다. 아직 혈기왕성한 후배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왜 그 욕을 그들이 아닌 우리가 대신 들어야 합니까?”라고 울부짖던 후배에게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시청률 2.8%. 입사 초기 애국가도 3%라고 그랬다. 그런데 메인뉴스 시청률이 2.8%다. 3~5%가 고착화됐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은 고사하고 왜 그런지 이유를 찾지도 않는다.

다짐
무엇이 이렇게까지 MBC뉴스를 외면하도록 만든 것일까?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왜 찍어? 방송도 안 나갈 거면서.”였다. 국민들의 절규에 찬 외침은 외면하고 오로지 권력의 나팔수로서만 앞장서 온 MBC. 한때 ‘좋은 친구’ 라고 여겼던 이의 배신에 대한 분노 표출이다. 이해가 간다. 그래서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다. 술자리에서 지인이 물었다. “요새 힘들지? 근데 억울하지 않냐? 너희가 안 싸운 것도 아니고..” 소주잔을 비우면서 말했다. “월급 받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이미 공범이다.”
9차에 이르는 대규모 집회. 약 두어 달 동안 태어나서 가장 많은 욕을 들었다. 카메라를 놓고 대오 속에 들어가 같이 소리치고 싶을 때도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스스로 다짐한다. 카메라를 놓은 손에는 촛불을 들지라도 지금 내가 할 일은 이 순간을 가장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누가 MBC를 욕하면 욕이 담겨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그 역시 역사고 기록이다. 담담히 기록해 나갈 것이다. 욕을 달게 들으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훗날 후대가 판단할 수 있도록 빠짐없이 기록할 것이다. 쫓겨났던 동료들이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그들의 몫까지 함께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뉴스의 가치를 사익으로 선택하는 자들에게 기필코 책임을 물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최저(崔杼)는 자신의 군주인 장공(莊公)을 죽였다. 그러자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태사, 太史)은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崔杼弒莊公)”라고 기록하였다. 그러자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최저는 사관을 죽였다. 그러자 사관의 동생이 사관의 직책을 이어받아서 또다시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崔杼弒莊公)”라고 기록했다. 최저는 다시 사관의 동생까지 죽였다. 그러나 3형제의 막내가 사관의 관직을 이어받아서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崔杼弒莊公)”라고 했다. 최저는 결국 사관을 죽이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