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삶] ‘지리산’ 종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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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S 채종윤 기자

 

프롤로그
동절기 입산 통제가 오후 2시부터니 늦어도 1시까지는 구례구역에 도착해야 한다. 65ℓ 배낭이 20kg 조금 넘었다. ‘나홀로 겨울 지리산 종주라…’ 긴장감에 등뼈가 곧추 섰다. 더욱이 오늘은 대한大寒이다.

PM 12:34 구례구역 도착
구례구역 앞 식당에서 올갱이 해장국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화엄사 가는 길, ‘날씨 좋을 때 다시 (종주)오라’는 택시기사님의 충고가 아직도 생생하다. “내일은 전국에 하루 종일 비가 오겠습니다.” 라디오가 한 번 더 겁을 줬다.

 

PM 16:30 코재를 넘다
화엄사에서 시작하는 전통적인 종주 방식을 따르기로 했으니 악명(?) 높은 ‘코재’ -앞 계단이 코앞에 닿아 ‘코재’라 부른다- 를 넘어야 한다. 3시간 만에 올랐지만 마라톤 선수들이 먹는 파워젤을 두 개나 먹어야 했다. 노고단(1,507m)은 천왕봉(1,950m), 반야봉(1,732m) 다음으로 지리산 제 3대봉이다. 저녁노을이 해무 아래로 조금씩 사위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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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05:45 노고단 출발
습설이 내린다. 칠흑漆黑같은 어둠이다. 어릴 적 엄마 손을 놓친 낯 선 길 위에서의 가슴 철렁함이 꿈처럼 되살아났다. 지상의 엄혹함이 사나운 문신을 보는 정도의 위협이라면, 헤드랜턴에 의지한 야간 ‘러셀(눈길을 처음으로 헤치며 길을 내는 등산)’이 주는 두려움은 인간 본성에 더 가까웠을 터. 그것은 태초에 불을 처음으로 본 인간의 오싹함, 바로 자연이 주는 경외敬畏가 아닌가 싶다. 두려움은 어둠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오전 8시쯤 삼도봉을 오르고 있을 때 난 처음으로 사람을 보았다. 여성이었고 혼자였으며 작고 왜소한 발에 아이젠도 하지 않은 당당한 모습이다. 수호천사를 보내주신 걸까?’ 이제 나는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고 그는 나의 흔적을 따라 가면 된다. 사람이, 사람이 낸 길이 바로 ‘희망’이구나.

 

AM 11:40 연하천 도착
노고단과 연하천 사이에 대피소는 없다. 능선을 따라 난 길에 물도 구하기 어렵다. 등짐도 크게 줄지 않았을 것이다. ‘해지기 전까지 세석에 갈 수 있을까?’ 습기 많은 눈은 이미 비雨로 바뀌었다. 손과 발부터 젖기 시작했다. 준비해 온 핫팩을 스틱과 함께 다부지게 쥐었다. 

 

PM 04:30 세석 도착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젖었다. 갈아입을 옷도, 덮을 침낭도 젖었다. 인간의 길에 고개를 내민 나뭇가지들 때문에 쪼그리다 놈들이 털어낸 얼음꽃에 차가운 뒷목덜미를 잡고서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망가진 모습에 안쓰러운 국립공원 직원이 히터 옆 자리를 선뜻 내 주었다. ‘널지 마시오!’ 안내판 모서리마다 젖은 내 옷가지들이 밤새 폴락였다. 

 

AM 10:00 장터목 도착
아침이다. 이젠 아름다운 봉우리 연하봉을 만날 때다. 이곳에 서서 잠깐 암투병 선배의 회복을 빌었다. 세석에서 2시간을 걷자 산청과 함양 사람들이 장을 세웠던 곳, 장터목이 나왔다. 천왕봉이 머리 위에 걸려 있다.  

 

AM 10:45 천왕봉 도착
장터목에 짐을 놓고 몸만 오르니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마루山 마루山마다 볕뉘(틈새로 들어오는 빛)가 들고 나며 이내 나의 경박스러움을 지청구했다. 멀리 운해 아래 여신령女神靈 얼굴
을 하고 있을 반야봉이 고개를 들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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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01:30 백무동 도착
산은 겨루게 하지 않는다. 등산을 경기로 하는 나라는 지구에 없다. 누구도 반갑게 인사를 하고 좁은 길에선 비켜 설 줄 안다. 노고단, 반야봉, 토끼봉, 칠선봉, 촛대봉, 천왕봉 등 16개가 넘는 1천 5백m 봉우리를 넘는 동안 스스로 자비를 배우고 겸손을 깨우친다.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이라 하지 않나. 내 이웃과 매일 이럴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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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명절이 지나 그러니까 2월 13일 저녁, 나는 영등포역에서 구례구행 표를 다시 만지작거리고 있다. 지리산 종주를 한 번 더 하게 된 것이다. 이번엔 야간산행에 초보자들의 짐까지 들고 갈 줄이야. 술자리 너스레가 화근이 됐지만, 그것도 내 팔자려니… 연하봉 앞에서, 이번엔 선배의 회복 대신 삼도천三途川을 건너간 형의 넋을 위로했다. 잠깐 안개가 끼었다. 이 자릴 빌어 다시 한 번 고인(김승현 OBS PD)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