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거부를 돌아보며_KBS 조일수 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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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차 기자들의 눈물 vs. 청와대만 바라보는 사장

물꼬는 4년 차 38기 기자들이 열었다. 길환영 당시 사장이 뽑은 기수였다. 세월호 보도에 대한 반성은 명령과 지시에 찌들었던 KBS 기자 집단을 흔들었다. 대통령의 사과가 발표된 다음 날, 정부 못지않게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던 언론에 화살이 돌아올 조짐이 보였다. 사내 주요 간부들에게 사장의 대국민사과 검토를 주장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직후 보도국장의 부적절한 발언에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KBS로 왔다. 자발적으로 회사로 모여든 기자들도 이 모습을 침통하게 지켜보며 책임 있는 간부들의 대응을 기대했다. 하지만 간부들의 입에서 ‘순수 유가족’ 이 아니라는 이상한 얘기가 회자되면서 끝내 사장은 희생자 가족들을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청와대로 향한 뒤에야 KBS 사장은 사과를 했다. 뒤이어 청와대 정무수석이 KBS 사장과 통화한 내용이 공개되자, 기자들은 땅에 떨어진 공영방송 사장의 위상에 분노했다. 그리고 이어진 KBS 보도국장의 폭로. 청와대만 바라보는 KBS 사장은 자진사퇴하라는 보도국장의 기자회견에 KBS 기자들은 매우 당연하게 사장 퇴진 요구를 시작했다. ‘설마 그래도 아닐 거야.’라는 일말의 기대는 기자총회 자리에서 본 사장의 민낯에 완전히 증발하고 말았다. 아무리 연차가 다르고 성향 차이가 있다 해도 KBS 기자라면 누구나 갖는 저널리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믿음, 바로 그것을 사장은 후비고 말았다.

 

너도 나도 동참, 하나가 되다

부장 기자들부터 보직 사퇴에 나섰다. 팀장들도 일어났고 앵커들도 동참했다. 흔히 사측이라 불리는 선배들과 싸울 필요가 없는, 입사 이후 처음 겪는, 어찌 생각하면 고민의 여지가 가장 덜한 싸움이었다. 누군가 노사 공동 파업이라 칭했다. 그래서 기자협회가 입장을 정하는 과정은 오히려 손쉬웠다. 공통의 생각만 좇아가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제작 자율성 측면에서 공감도를 높인 PD들이 곧바로 동참했고, 경영·기술협회가 동조했고 감격스럽게도 수년간 으르렁거렸던 KBS 내부의 두 노조가 공동 집회에서 서로의 깃발을 교환한 뒤 흔드는 장관을 연출했다. KBS 최고 의결기구라는 이사회의 결단을 촉구하는 기자들의 노력 역시 지극히 자발적이었다. 고참들은 경험이 가져다준 정계·학계 인맥과 퇴직한 선배들을 찾아다녔고 후배들은 거리에서, SNS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 실행에 옮겼다. 통일된 지침·지시보다 KBS 기자 각자가 일할 때 발휘하는 그 성실성으로 싸우다 보니, 하루하루가 일하는 날 이상으로 바쁘게 톱니바퀴처럼 움직여갔다. 그리고 모두의 염원은 마침내 이뤄졌다.
사장이 해임된 뒤 상황은 더욱 힘들다. 공동의 목표가 사라진 뒤 각자도생의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사장의 기존 체제를 유지했던 간부진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고, KBS발 개혁을 우려한 외부 세력의 프레임 씌우기도 본격화되고 있다. 변화의 속도에 두려움을 느낀 안정주의자들은 속도 조절이라는 이름으로 브레이크를 걸고 있고, 기존 체제로의 급속한 적응을 우려하는 후배들은 다시 한 번 봉화를 올릴 기회를 찾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임 KBS 사장이 선임되는 과정이 여전히 국민권력보다는 정치권력의 품 안에 있다는 현실이 조만간 KBS 내에 또 한 번의 광풍을 예고하고 있다.

 

동료가 있기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다행히 제작거부 이후 안팎에서 KBS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가운데 정치권력과 관련한 뉴스 특종과 프로그램들이 속속 잇따랐다. 이것이야말로 KBS 구성원들이 갖는 저력이자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언뜻 보면 과거와 비슷한 큐시트, 유사한 제작물로 보이지만 지금의 KBS 뉴스는 세월호 보도를 통해 우화(羽化: 번데기가 성충이 되는 과정)의 과정을 거쳤다. 거기에는 각성한 KBS 기자들의 의식과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의미를 찾는 투쟁의 과정이 녹아 있음을 자신한다.
이를 위해 KBS 기자들은 눈에 보이는 사장이 아닌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제작거부 과정에서 평기자·부장·고참이 하나가 됐고, 그렇게 형성된 KBS 기자 집단의 헤게모니를 더욱 강고하게 유지해나가는 게 현실적인 목표가 되고 있다. 밀실에서 혼자 고민하고 혼자 판단하고 혼자 행동하기보다 광장에서 말하고, 교류하고, 서로의 생각을 의지해가며 KBS 기자 내부의 대세를 유지해 가려 한다. 그렇게 KBS 기자 사회의 문화가 바뀌면 그 어느 사장이 와도 KBS 뉴스의 독립성과 제작 자율성은 유지될 것이고 KBS 뉴스, 나아가 공영방송 KBS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 되찾을 날이 올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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