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이름 석 자를 쓰는데 걸린 시간_SBS 권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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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권지윤 기자(시민사회부 법조팀)

미납 추징금 1,672억 원
2013년 제헌절 전날. 검찰이 전방위적이며 공격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다. 한때 대통령 호칭을 썼던 사람의 사저에 검사와 수사관도 보냈다. 이름 석 자에 시민의 슬픔, 국회의 무능, 사법기관의 무력함을 내포한 ‘전두환’ 씨. 그가 숨겨둔 비자금, 정확히 얘기하면 미납 추징금 환수를 위해 검찰이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이 사건의 시작은 수사가 아닌 환수였다. 1997년 전두환 씨가 내란죄와 뇌물죄로 무기징역 형 확정판결을 받으면서 함께 선고된 추징금은 2,205억 원. 이 중 미납된 1,672억 원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다. 공무원범죄몰수법이 개정되기 이전인 올해 초, 전 씨에 대한 추징금 시효가 10월로 다가오게 됐다며 언론은 관련 기사들을 쏟아냈다. 시효 3년이 임박할 때마다 반복됐던 기사다. 그때마다 검찰은 재산 일부를 압류하는 식으로 시효만 연장하며 체면치레를 했다. 검찰은 30년 가까이 은닉됐고 세탁을 거쳐 증발된 비자금, 꼬리표가 없는 돈을 추적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입장을 보였다. 핑계로 보이는 것도 있지만, 수긍이 가는 점도 있다. 96년 전두환을 ‘수사’했던 검찰은 당시 전 씨가 기업들로부터 거둬들인 돈은 9,500억 원이라고 밝혔다. 5공 말인 1987년 국가 예산이 15조 5천억 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국가 예산의 16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당시 검찰은 시효가 살아있고 대가성이 인정되는 것만 뇌물죄를 적용했다. 그러나 뇌물로 인정된 불법 재산을 몰수하는 성과는 내지 못했다. 

무신경 속 꼭꼭 숨은 비자금
몇 달 전, 전 씨 비자금을 추적하기 위해 당시 수사팀 관계자를 만나봤다. 그는 “96년 수사의 핵심은 내란죄였다. 전 씨를 기소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했다. 불법자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는 핵심이 아니었고, 기소에 반드시 필요한 요건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전 씨 수사를 하기 1년 전인 95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독일의 이론을 빌려 면죄부를 줬던 검찰로선 1년 만에 자신의 결정을 뒤집던 상황이었다. 전 씨의 이름 석 자를 공소장에 쓰기 위한 작업에만 열중했고, 비자금이 어디로 갔는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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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단추는 잘못 끼워졌다. 언론, 국회, 사법기관이 침묵하면서부터 전 씨의 불법재산은 지하로 숨었고, 무기명 채권, 차명 부동산 등 다양한 형태로 세탁됐다. 그 출발점을 찾기엔 너무 긴 시간이 흐른 것이다. 현재 검찰이 압류 또는 조사 중인 불법재산의 형태는 미술품, 부동산, 채권, 법인, 해외 페이퍼 컴퍼니 등 다양하다. 비자금이 유입됐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과거의 자금 흐름을 보고 있지만, 이미 섞일 대로 섞여버린 돈 줄기에서 비자금 줄기를 찾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 보인다. 게다가 전 씨의 장남 재국 씨가 만든 페이퍼 컴퍼니는 국내에서 세탁된 비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간 통로로 의심되고 규모도 가장 클 것으로 기대하지만, 계좌 내역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지연된 정의, 왜곡된 역사
이렇듯 전 씨는 지연된 정의의 상징이 됐다. 비자금이 전 씨의 자녀로 이어지고 증식되는 과정은 왜곡된 역사의 재생산과 궤를 같이한다. 시민 학살과 고문을 목격하고도 침묵한 권력기관, 마침내 그의 이름 석 자를 공소장에 기입했지만 대통합의 목적으로 사면한 정부, 기소까지만 자신의 역할로 보고 추징금 환수에 소극적이었던 검찰.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전 씨의 악행에 대한 판단은 ‘역사의 단죄’가 아닌 ‘평가의 몫’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마저 조성됐다. 그의 악행은 개인의 기억이 아닌 공공의 기억으로 남아 있고, 피해자들은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또다시 역사는 그렇게 왜곡된 것이다. 전 씨는 범죄자지만, 상응하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것이 이 사건의 핵심이다. 법치주의는, 국가가 절차적 정의를 토대로 결과적 정의를 이루겠다는 사회적 약속을 지킬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미 사면된 그를 같은 죄로 다시 법정에 세우는 건 불가능하지만, 남은 형벌은 집행할 수 있다. 바로 추징금이다. 범죄로 얻은 이익을 범죄자가 향유하지 못하게 하는 추징금 제도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도 환수는 성공해야 한다.

일각에선 추징금 수사의 근거가 된 공무원범죄몰수법 개정안을 두고 특정인 때문에 법을 바꾸는 ‘위인설법’爲人設法이라며 위헌 주장도 펴지만, 이는 사태의 본질을 간과한 것이다. 그간 추징금제는 형벌의 일종이면서 지나치게 관대했고, 현실을 반영 못 할 정도로 느슨했다. 이 때문에 개정된 것이고, 전두환 씨는 모든 법이 그러하듯 상징적 계기일 뿐이다. 늦게나마 정의를 찾아 나선 검찰이나 이제야 개정된 법 모두 때를 놓친 아쉬움이 있지만, 추징금 환수마저 실패한다면 아쉬움이 아닌 – 5공식 표현을 빌리면 – ‘정의 구현’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