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란 이름] 저널리스트 무게 묵직한 요즘, 그때 그 선배를 떠올린다


저널리스트 무게 묵직한 요즘, 그때 그 선배를 떠올린다


원리원칙주의자였던 그하지만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던 그


 


BBS 김종범 기자


 


 




 


저널리스트의 길은 험난하고도 고달픈 여정이다. 시시각각 명멸하는 정보와 현상의 시류(時流)를 쫓아 정수(精髓)를 끌어내야 한다는 사명이 심장을 짓누른다(Press). 시대의 증언자, 관찰자로서 뉴스의 맥을 짚어내는 소임은 기본. 때로는 실체적 진실을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외로운 사투를 벌이기도 한다. 달콤한 성취감에 젖기도 하지만 쓰라린 패배감에 무너지기도 한다. 좌절과 불확실성은 기자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 그렇게 절벽 같은 어둠에 낙담하고 절망에 몸부림칠 때 길잡이별 처럼 앞길을 비춰주는 존재가 바로 선배가 아닐까?


 


언론사는 서열구조로 짜여진 전형적인 도제 시스템이다. 취재근성이나 글 쓰는 재주 못지않게 선후배간의 유기적인 조합과 팀워크가 중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내기 후배들은 선임들에게서 기본적인 노하우뿐만 아니라 기자로서 갖춰야 할 품성과 마인드까지 전수받는다. 그런 면에서 선배는 후배들에게 기술적인 트레이너이자 정신적인 멘토 같은 존재다.


 


필자에게도 마음 한 켠에 각인된 한 분의 선배가 있다. 10여 년 전, 신문사 사쓰마리 시절, 선배는 내가 소속된 사회부 데스크였다. 육군 장교 출신답게 매사에 에프엠(Field Manual)을 강조하는 원리원칙주의자였던 그는 별명이 호통대장, 독사로 불릴 정도로 편집국 내에서 악명이 높았다. 아이템 보고가 부실하거나 데드라인(기사마감 시한)을 어길라치면 상소리는 기본. 송고된 기사가 어법이 안 맞거나 완결성이 떨어질 때에도 가차 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완벽주의 기질로 실수투성이 신입기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곤 했다.


특히 후배들이 공들여 써낸 기사들을 빨간 색연필로 난도질하는 모습은 선배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군대로 치면 고춧가루 상관의 캐릭터였지만, 흐트러짐 없는 권위와 냉철한 카리스마는 후배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선배의 악질적인 통치스타일은 후배들의 뒷담화 단골메뉴로 애용됐지만, 그의 열정과 직업정신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기자의 기본기 못지않게 선배는 언론인으로서 지켜야 할 품격이나 직장예절에도 엄격했다. 이에 관한 에피소드 하나. 수습딱지를 떼고 한 달 쯤이나 지났을까. 기분전환이나 할 겸해서 앞머리를 살짝 브릿지(부분 염색)하고 회사에 출근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 행색을 목격한 선배가 양아치 꼴을 하고 왔다며 격노했다. 당시 개성을 중시하는 신세대인 나로서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기자라고 해서 정형화된 틀을 강요받을 이유가 없다며 반박논리를 폈고, 예기치 못한 나의 반격에 선배의 분노 게이지는 임계점을 넘어서고 말았다. 결국 그날 나는 기자를 그만 두라는 말까지 들으며 사무실에서 쫓겨나야 했고 염색 사건은 필자가 머리색깔을 다시 바꾸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엷은 미소를 짓게 만드는 추억의 편린일 뿐이지만, 기자로서의 자존감과 프로정신을 중시했던 선배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아닌가 싶다. 선배는 그 정도로 기자=엘리트 집단이라는 자긍심이 대단했다. 그리고 어디서든 주체가 되라며 隨處作主(수처작주)’라는 말로 후배들을 다독였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선배로서의 근엄함을 잃지 않았던 그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선배가 정해놓은 한 가지 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배들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치 엄격했지만, 선배는 그날 쌓인 감정의 앙금은 어떻게든 푸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근무를 마치고 종종 후배들을 호프집이나 고깃집으로 호출하곤 했는데, 술자리에서 180도 달라지는 변신술은 놀라울 정도였다. 평소의 악질 이미지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대신 다정한 룸메이트처럼, 자상한 친형의 모습으로 후배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었다. 적당히 취기가 돌 무렵이면, 선배를 향한 서운함이나 마음의 벽은 어느새 허물어져 있었고 영혼의 교감이랄까. 각별한 동지적 관계를 느낄 수 있었다. 선배는 편집권 문제로 경영진과 마찰을 빚다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그의 송별회 자리에서는 멘토와의 석별을 아쉬워하는 후배들이 눈물바다를 이뤘다. 선배는 이후 유학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정착해 이민자로서 새로운 삶을 꾸려나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십 수년이 지난 지금, 어느덧 나도 위보다 후배들이 더 많은 중견의 위치에 서 있다. 선배다운 선배를 찾기 힘들고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역할 모델이 사라진 세태에 저널리스트로서의 삶의 무게도 더 묵직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그럴때면 그 선배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열정을 겸비한 진정한 저널리스트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