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스토리텔링인가?_뉴스타파 최경영 기자

12-1 탐사기획보도

 

12-2 최경영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왜’ 하는지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스토리텔링 방법론, 즉 ‘어떻게’는 이미 글로 많이 나와 있다. 찾아보면 된다. 바쁜 분들을 위해 포인터 연구소(poynter.org)의 조언을 찾아 놨다. 

 

 

 

  

‘저널리스트가 좋은 비디오 스토리텔러가 되기 위한9가지 핵심 요소’. 12-3 저널리스트가 좋은 비디오

http://www.poynter.org/how-tos/digital-strategies/163352/9-key-elements-that-can-help-journalists-be-better-video-storytellers/
(짧은 주소: http://bit.ly/1fV6h8I)

 

 직선적 사고에서 직관적 사고로

‘왜’는 ‘어떻게’보다 중요하다. ‘왜’를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술자 수준에 머물게 된다. 사실 ‘어떻게’를 고민하다 보면 ‘왜’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왜’라는 뿌리는 ‘어떻게’라는 열매를 잉태하고 자양하는 근원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방송기자들이 스토리텔링에 주목하기 시작한 지는 이미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인터넷이 보편화됐다. 변호사, 의사, 기자 등 이른바 전문직의 설 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예견들이 득세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 독점의 시대가 지나가고 공유와 소통이라는 개념이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좀 더 미시적으로 들여다보자. 인터넷을 제외하면 우리 방송기자들이 지난 10여 년 동안 겪은 변화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나는 그걸 비선형(Non-linear) 편집기의 도입이라고 생각한다. 컷 단위로 편집하던 1대 1 편집기가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고, 1대 2 편집기가 들어와 방송 주조실의 어지간한 편집 기능을 앗아가더니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비선형편집기가 편집기계의 대명사가 됐다. 기계라기보다는 고성능 컴퓨터에 파이널 컷 프로나 프리미어와 같은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것이다. 기존의 구식 편집기를 선형(Linear)이라고 부르고 자신은 비선형이라 부르는 이 패기 넘치는 편집기는 구식 기계에 익숙한 사람들의 온갖 저항에도 불구하고 점차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13-1 세월호 골든타임

13-2 MOPIA

거의 모든 방송사들을 접수해버린 이 비선형 편집기를 만든 IT 기술자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명확하다. 이 편집기는 과거 1대 1 편집기로 편집할 때처럼 이야기를 논리적 얼개를 통해, 직선적으로, 미리, 구성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그게 화면이든, 기자의 오디오든, 음향이든, 음악이든 간에 얼마든지 끊고 붙이고 합칠 수 있다. 그래서 논리적 틀이 얼마간 흐트러져도 편집을 하는데 별 부담이 없다. 아니, 점차 직선적 사고가 아니라 직관적 사고의 길이 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방송기자가 시청자와 소통하면서, 텍스트적·직선적 사고에 의지해 논리적으로 짜놓은 얼개만 따를 필요가 없어졌다. 편집 도중 떠오른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사고가 영상을 통해 투영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문제는 인간의 부족한 상상력일 뿐. 기계는 이미 사람의 일하는 방식,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저널리즘의 역사도 그렇다. 말이 글이 되고, 활자가 탄생해 경전을 펼쳐내고, 프린트 기술이 발달해 책이 보편화되고, 전신(Telegraph)이 발명돼 대륙 간에 소식이 타전되고, 인터넷으로 세계인을 이은 수천 년에 걸친 기술 발전의 역사는 우리의 행동양식과 가치관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했다. 그래서 기존의 행동양식과 가치관을 고수하려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기술의 발전은 항상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fact)만으로는 ‘공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현재 저널리즘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큰 가치관의 변화는 무엇인가? 그건 ‘공감’이라는 단어에 모두 녹아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실(fact)에 감동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만으로는 공감시키기 힘들다. 저널리즘의 기본적 사명이 사실의 전달이니 사실은 전달해야겠지만, 수용자들이 공감하지 않는다면 사실 전달을 위한 노력의 효과는 크게 반감된다. 그래서 내용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형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정보 독점 현상이 이완될수록, 이런 형식에 대한 고민은 필수적이 된다. 비슷한 내용을 다르게 보이게 하는 형식, 또는 비슷한 내용일지라도 더 공감하게 만드는 형식을 지향하지 않으면 점점 살아남기 힘들어진 게 오늘날 방송기자의 현실이다.

 14-3 FIVE MINUTES 14-4 가난한 이들은그런데 사실 내용과 형식은 유리되어 있지 않다.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우리가 방송을 하다 보면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도 하고 ‘내용이 새로운 형식을 강제’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비유하자면 마치 고려 후기 신흥 사대부의 유교적 이념을 표출하기 위해 시작된 시조時調가 조선 후기에 그 정형적인 틀을 벗어버리는 과정과 흡사하다. 조선 양반의 정형적인 평시조는 백성의 자유로운 사설시조에 점점 밀려나면서 그 형식이 파괴되고 내용도 훨씬 진솔하고 다양화됐다.

지금 우리가 요구받고 있는 이 ‘공감’이라는 가치관도 마찬가지다. ‘스토리텔링’이라는 일종의 유행어에 함유된 가치는 형식의 파괴이자, 내용의 솔직함이며, 다양한 가치관의 용인이다. 정보의 독점이 사라지니 수용자는 더욱 기존의 정형화된 보도 형식에 식상할 수밖에 없고, 보도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게 되면 이는 자주 소통의 실패로 이어진다. 대중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전제로 운영되는 언론사로서는 동맥경화에 걸리는 꼴이 된다. 언론사의 핵심 가치가 사실 전달에서 자유와 개방성을 전제로 한 ‘공감’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수용자가 원하는 바는 ‘사실을 공감할 수준에서 전달해 달라’는 것이며 우리는 이에 역행할 도리가 없다.

형식과 내용의 균형점을 찾아야

그런데 왜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못하는 것인가? 못한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막고 있는 것인가? 나는 대부분의 한국 방송사들이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하고 싶지만 못하고 있다고 본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떤 방송사는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포함할 새로운 가치관이 두렵기 때문에, 어떤 곳은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요구하는 새로운 행동양식의 변화가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 모두에 링크를 걸어둔 ‘저널리스트가 좋은 비디오 스토리텔러가 되기 위한 9가지 핵심 요소’에 보면 핵심요소의 첫 번째가 감정(Emotion)이다. ‘감정이라니… 사실을 전달하는 보도에 있어서 감정을 불어넣고, 이를 의도적으로 삽입시키려 하다니. 이 얼마나 불경한 짓인가? 역시 상업주의 미국인들의 천박함이란….’ 이렇게 천박하게 말할 보도국의 깊이 없는 ‘꼰대’들은 앞으로 ‘그림 좋은’ 보도를 후배 기자들에게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미안하지만 저널리즘 역사에 완벽한 객관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마치 자본주의 역사에 단 한 번도 공정한 경쟁이 이뤄진 적이 없고, 사회주의 역사에 단 한 번도 공평한 분배가 이뤄진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스토리텔링을 함에 있어서 얼마나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느냐는 취재한 사실과, 전해주고 싶은 가치 사이에 얼마나 잘 균형을 맞출 수 있겠냐는 질문으로 귀결될 것이다. 취재한 내용은 ‘결’대로 말하더라도, 말하고 싶은 형식이 적당하지 않다면 그 ‘결’에 맞게 형식을 바꿔주면 그만이다. 사실을 과장할 필요도 없지만 사실의 의미를 부러 축소할 필요도 없다. 형식을 통해 내용을 과장할 필요도 없지만 규격화된 형식 때문에 내용이 손상되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특히, 그 균형점을 찾는 과정에는 보도국의 어떤 정치적 계산이나 개인의 이데올로기적 편견도 용납되어선 안 된다. 미리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를 배제하는 사회, 미리 무엇인가를 검열하는 보도국에서는 깊이 있는 취재와 공감 가는 내용이 자유로운 형식에 녹아든 신선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내기가 요원하다. 사실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다. 한국의 방송언론은 스토리텔링의 방법론을 찾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원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곡을 찾아 나서는 수도사들을 먼저 죽이지 말라. 죽여 버린 언론의 자유를 살리라는 말이다. 해직자들을 복직시키고 보도국에 자유와 개방성을 허하라는 말이다. 그게 의미 없는 방법론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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