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자유의 적은 ‘포기’

동료 얘깁니다.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 인테리어가 고민이랍니다. 항상 그렇듯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돈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단가를 맞추기 위해 예비부부가 제일 먼저 합의한 건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없애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배우자가 방송기자로 일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텔레비전이 부부 사이와 앞으로 생길 아이에게 미칠 악영향 때문만은 아닙니다. 앞으로는 텔레비전이 없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네요.

권력 비판 보도 실종, 보도국 내 논쟁도 사라져
변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고, 정작 지켜야 할 것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권력 비판 보도도 그중 하나입니다. 비판과 고발은 민감하지 않은 대상에 한해서만 이뤄집니다. 뉴스에 등장하는 건 날씨나 동물, 혹은 명백히 범죄를 저지른 형사 피의자들뿐입니다. 언론이 아니면 비판하기 어려운 ‘진짜 강자’, ‘진짜 갑’인 정치권력과 자본 권력에 대한 비판은 사라졌습니다.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 보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권력자를 고발하는 뉴스는 성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예전엔 지극히 당연했던 사안을 두고도 이제는 ‘이런 게 방송에 나가도 되나’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널리즘의 칼끝은 무뎌졌고, 방향도 틀어졌습니다.

언론 자유 스스로 포기, 외부 아닌 ‘내부의 적’
수습 시절, 8시가 넘어가면 사회부에서는 종종 고성이 오갔습니다. 9시 리포트 문장 하나, 인터뷰 하나를 두고 평기자와 데스크가 치열하게 논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도국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논쟁은 사라졌습니다. 부장과 데스크는 보수화됐고 평기자도 더 이상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싸워도 변하는 게 없으니 지쳤을 수도 있고, 자기 검열에 익숙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 어느 쪽이 되었든 둘 다 문제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자유를 잃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 문제는 오히려 간단합니다. 언론인들이 다함께 외부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 자유에 있어 더 큰 문제는 기자 스스로 하고 싶은 게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게 없어지면 외부에서 압력을 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유를 억압했다는 비난을 살 필요도 없습니다. 발제와 취재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억압이 없으니 연대해서 싸울 수도 없습니다.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지금, 언론 자유의 큰 적은 아마 억압보다 포기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