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삶] 순수했던 시절 만난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뇌


특집_ 나를 만든 책들


순수했던 시절 만난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뇌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MTN 홍혜영 기자


# 내 인생을 바꾼 책이요?
“홍 기자님, 급하게 부탁드릴 게 있어요. ㅠ.ㅠ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책에 관해 글 좀 써주세요. 주제가 쉬우니까 금세 쓰실 수 있죵? ^^;”
쉽다고요? 순간 ‘으으…’ 머리가 지끈했다. 언론사에 디밀던 수많은 입사지원서에 가장 마/지/못/해 썼던 칸. 취미, 특기, 그 다음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다.
골똘히 생각해 봤다. 내가 요즘 접하는 활자란 것들은 ‘물’ 먹은 것 없나 읽는 기사, 먹고 살기 위해 읽는 경제 서적, 심심풀이로 클릭하는 연예 기사, 그리고 틈틈이 숨 쉬기 위해 읽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이 전부다.
최근 몇 년간 책이나 긴 글을 읽고 깊이 사색한 적은 없는 듯하다. 그 때 그때 작은 울림을 준 책은 많았겠지만 콕 짚어 기억나는 건 없다.
그렇게 기억을 더듬다보니 서른 셋에서 열 여섯까지. 훌쩍 올라가 버렸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책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아, 내가 그런 심오한 고전을 읽은 적도 있구나.

# 선도부 짱의 뒤통수를 때린 책 ‘죄와 벌’
중학교 3학년. 돌아보건대 가장 융통성 없는 삶을 살았던 시기다. 나름 선도부 짱이라고 아침 일찍 등교해서 눈에 불을 켜고 전교생의 두발, 복장을 꼼꼼이 살폈다.
학교가 파하면 곧장 버스를 타고 스파르타식 학원으로 달려간다. 국, 영, 수, 과학… 과목마다 배운 것을 매일 시험 보고 성적순으로 앉아 수업을 듣는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기 그지없다. 덕분에 입 안에는 하얗고 동그란 것들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그 때 학구열을 다 쏟아 버린 부작용으로… 고등학교, 대학교 땐 주야장천 놀아 제꼈나 보다.)
10대 소녀답게 은행잎, 단풍잎 주워다 책장에 끼워 넣고 가끔 눈물도 훔치고 하면서 독서할 겨를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우연히 책꽂이에서 빼든 책이 ‘죄와 벌’이다. 가뜩이나 ‘정독’하는 스타일이라 만화책을 보는 속도도 느린 판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니. 졸린 눈으로 침대에 앉아 매일 몇 장씩 읽다보니 한 권을 다 읽을 때까지 한 달은 족히 걸린 것 같다. 죄와 벌의 주인공 청년 라스콜리니코프가 고뇌했던 만큼이나 나에게도 괴로운 한 달이었다.

젊은 지식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만의 잘나고 고고한 논리로 탐욕적인 전당포 노파를 처단, 살해한다. 하지만 목격자인 노파의 여동생까지 살해하게 되면서 당황한 라스콜리니코프는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으로 고통 받는다. 이 때 창녀인 소냐를 만나 그녀의 맑고 순수한 정신을 보며 자신의 독선적인 합리주의가 허구였음을 깨닫는다.

죄와 벌의 줄거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는다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더군다나 이 책의 감상평이랍시고 휴머니즘, 도덕률 따위의 단어를 나열하는 것도 진부하다. 워낙 쉽게 읽어 내려가기 어려운 책이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 아주 정교한 심리 묘사에 빠져든 나는 두통까지 느꼈던 듯하다. 그러면서도 중간에 책을 던지지 못했던 것은 눈만 감으면 라스콜리니코프가 사는 페테르부르크 골목이 그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하고 음산한 전당포, 어둡지만 따뜻한 소냐의 방…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바쁜 나날이었지만 정신은 유체이탈해서 이미 페테르부르크에 가 있었다.
(당시 모스크바에 파견 근무를 나가셨던 아버지 덕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갈 수 있었다! 구 소련이 개방된 뒤였지만 그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러시아를 찾는 민간인 여행객은 거의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밤기차를 타고 달려간 그 곳에서 현지 대학생 가이드의 도움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의 실제 배경으로 삼았던 골목을 찾았다. 실물을 보고 상상 속 장면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신기하게도 그 곳은 내 기억 속 모습과 너무나도 같았다. 마치 시간을 되돌린 듯한 느낌… 그 때 찌릿한 소름을 잊을 수 없다.)

죄와 벌의 기억이 이렇듯 강렬한 건 가장 순수했던 시기에 어렵게 읽은 고전이기 때문이다. ‘대체 도스토예프스키가 하려는 말이 뭐지?’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장면 장면을 곱씹으며 가슴에 되새겼고 그러면서 주인공의 고뇌에 동참했다. ‘죄와 벌’이 현대사회에 주는 메시지, 이런 건 따지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그랬기에 고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 첫사랑을 떠올리며

부끄럽게도 그 뒤로는 머리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철학적인 질문들을 외면하면서 살아왔다. 하루하루 바쁘다는 핑계로. 17년 만에 첫사랑을 떠올린 기분이다. 온전히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사랑’에 울고 웃던 애가 어느 덧 사람이 아닌 집안 연봉 배경을 복잡하게 따지는 이해타산적인 속물로 변한 느낌이랄까. (‘비유하자면’이지 지금 내가 남자볼 때 그렇다는 건 아니다.ㅋ)
기자질 한답시고 얼마나 ‘단무지’(단순+무식+지*)처럼 살아왔는지 짧은 감상문을 쓰는 데도 진땀이 난다. 선선한 가을 밤, 쏘맥 몇 잔 덜 마시고 들어가서 고전 한 권 끼고 순수했던 그 시절 문학소녀로 돌아가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