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삶] 산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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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연보흠 기자

시작은 2001년, 정말 우연한 계기였다. 아내가 차를 바꿨다(난 당시 면허도 없었다). 새 차를 타니 돌아다니고 싶었다. 주말마다 서울 근교 계곡을 찾았다. 걷기 좋은 계곡 길은 절로 통했다. 처음 오른 절이 운악산 현등사였다. 산중턱, 고즈넉한 암자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한가롭고 편안했다. 그렇게 난생 처음 산을 타기 시작했다. 

 

중독

모든 중독이 그렇듯 나도 모르게 산에 빠져갔다. 휴일엔 무조건 북한산이나 도봉산을 찾았다. 야근을 하면 잠시 눈을 붙인 뒤 집 근처 관악산에 올랐다. 그러다 보니 10년 동안 북한산과 도봉산, 관악산만 6백 번 넘게 올랐다. 휴가 때는 어린 딸을 들쳐 업고 하루에 하나씩 산에 올랐다. 월출산, 가야산, 주왕산, 설악산 마등령을 모두 아이를 업고 올랐다. 내 땀으로 범벅이 된 아이는 자기가 오줌을 쌌다며 울곤 했다. 민주당 국민경선을 취재하러 제주에 갔을 때는 한밤중에 택시를 불러 한라산 윗세오름에 올라 일출을 본 뒤 취재를 시작했다. 무서웠지만, 뿌듯했다. 산꾼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혼자 산을 타면 ‘중독자’로 분류한다고 한다.

힐링
집 근처 관악산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내가 왜? 모든 것이 좋았다. 공기, 바람, 하늘, 바위, 나무, 계곡, 오솔길, 오를수록 트이는 시야까지… 나 자신의 변화도 놀라웠다. 산에 빠질 무렵 정치부 ‘말진’이던 내 몸무게는 0.1톤을 넘나들었다. 경찰, 검찰, 정치부를 거치며 닥치는 대로 술과 고기를 흡입한 결과였으리라. 그런데 산을 찾아 숨이 턱에 찰 때까지 걷다보면 일주일 동안 쑤셔 넣은 고기와 술이 몸 밖으로 다 뱉어지는 것 같았다. 풍선 같던 배가 조금씩 납작해지기 시작했다. 산에 중독되면서는 살을 빼기 위해 산을 탄 게 아니라, 산을 더 많이 타기 위해 살을 뺐다. 이렇게 10년 동안 20kg이 내 몸에서 사라졌다. 더 반가운 변화는 머리가 가벼워 진다는 것이다. 산을 오르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고민과 잡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너무도 태연하게 벌어지는 지금 MBC를 다녀야 하는 나에게 산은 너무나도 큰 위안이다. 힐링이다.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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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을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산에 가지 말까하고 이불속을 파고 들 때도 있다. 하지만 툭툭 털고 나서면 후회하는 일은 결코 없다. 산이 주는 보상은 너무나도 정의롭다. 만만한 산은 없다. 어떤 산도 정상에 오르기까지 한두 번의 고비가 있다. 그러나 힘을 들이고 애를 쓰면 그만큼 값진 선물을 준다. 하지만 그 이상을 욕심내면 산은 돌변한다. 산을 타면서 죽을뻔한 일도 몇 번 있었다. 출입이 금지된 북한산과 도봉산의 바위를 탈 때 그랬고, 좀 더 멋진 경치를 탐내 월악산 바위를 내려올 때도 그랬다. 인간이 겸손할 때 산은 너그럽지만, 오만하고 욕심 많은 인간 앞에서는 가혹할 만큼 냉정하다.

 

가치

등산을 시작할 땐 무조건 큰 산, 명산을 찾았다. 국립공원부터 시작했다. 물론 이름값을 못하는 산은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명산 주변에 숨어 있는 나지막한 산을 찾는 버릇이 생겼다. 명산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명산을 걷는 길 못지않은 매력이 있다. 특히 바다나 큰 호수가 있는 곳에선 낮은 산의 조망이 오히려 뛰어난 경우도 많다. 월악산 줄기인 제비봉이나 둥지봉, 작은 동산(제천)에서 바라보는 충주호의 모습이나 남해 설흘산, 통영 벽방산, 거제 망산, 해남 달마산에서 바라본 남해는 너무나도 황홀했다. 사실 산은 어딜 오르느냐 이상으로 언제 오르느냐가 중요하다. 계절과 날씨는 물론, 시간대별로도 산은 몰라볼 만큼 달라진다. 해발 198미터에 불과한 파주 심학산이 그렇게 감동적인 낙조를 보여줄지 누가 알았겠는가. 높든 낮든 가치 없는 산은 없다.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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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산에서도 속도 경쟁을 했다. 나를 앞지르는 등산객이 있으면 반드시 따라가 앞질러 버렸다. 그 탓일까. 몇 년 전 포천 국망봉을 탄 뒤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왼쪽 무릎이 아팠다. 겁이 덜컥 났다. 이러다 앞으로 산을 못 타면 어쩌지? 다행히 회복은 됐지만 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 이제 40대 중반이다. 조금 더 겸손하게 산을 타야겠다. 남은 인생도 산과 동행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