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어쩔 수 없는 굴레

방송 종사자에게 시청률은 어쩔 수 없는 굴레다. 학생이 시험을 치르고 성적표를 받듯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고 나면 시청률로 평가된다. 다매체·다채널 시대가 되면서 방송사들은 시청률 1퍼센트 차이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방송 프로그램의 수명과 내용을 오로지 시청률에 의해서만 결정해도 괜찮은 것일까? 시청률은 방송 소비자의 니즈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까? 이런 의문이 이번 특집기사의 배경이다.
시청률 논쟁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미국 상업 텔레비전의 경영자들은 1950년대부터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수 시청자’를 존중하는 편성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주 시청 시간대 프로그램에 성과 폭력의 묘사가 난무했으며 대중의 문화적 취향을 하향 평준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한 텔레비전에 대해 사회적 비난이 빗발치자 방송사 경영진은 문화적 민주주의(cultural democracy)를 내세웠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다수의 의사에 따라 지도자를 선출하고 국가적 중대사를 투표로 결정하듯, 텔레비전도 문화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시청률이라는 투표 결과로 프로그램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는 항변이었다.
그러나 문화적 민주주의라는 말은 교묘한 기만에 불과하다. 시청률은 기존 프로그램들 가운데에서의 선택을 나타내는 것일 뿐 시청자의 의사를 반영할 수는 없다. 또 텔레비전이라는 매체 자체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게 된 시청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게다가 시청률 조사는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의 ‘호/불호‘(like/dislike)를 묻는 것이지, ‘유익/유해’(good/bad)를 묻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방송사와 시청자 간에 다양하고 쌍방향적인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확대되고 있지만, 이 역시 함정은 있다. 각 프로그램 사이트에 의견을 밝히는 시청자들은 거의 대부분 시청률 추세와는 전혀 무관한 예외적인 ‘도덕적’ 시청자들이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의 꾸짖음으로 모처럼 착한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치자. 예상대로 칭찬이 폭포수같이 쏟아진다. 이런 프로그램이 왜 이제야 나왔느냐고 개탄하는 시청자도 있다. 하지만 다음 날 시청률을 받아보면 그래프가 X축을 따라 바닥에 납작 붙어 기어간다. 칭찬만 하고 아무도 보지 않은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시청자들의 배신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의견을 밝히는 시청자와 의견을 밝히지 않는 시청자의 차이 때문일 수 있다. 절대다수의 시청자는 자기 의견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게 할 시간도 없고 정성도 없다. 그냥 시청하거나 말거나 하는 양자택일로만 말할 뿐이다. 시청률의 해법, 그것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