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44년 전 그들

[발행인 칼럼]
44년 전 그들

안형준 방송기자연합회장

‘이달의 방송기자상’과 달리, 상금이 최소 3백만 원인 상이 있습니다. 겨울에 한 번 시상하는 ‘안종필 자유언론상’입니다. 1987년 가을에 제정됐는데, 활자매체보다 방송 종사자들이 상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안종필 선생이 누구인지는 모르는 이가 많습니다. 

안종필 선생은 1975년 3월 17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사건으로 해직의 길을 걸었던 기자입니다. 동아투위 사건으로 동아일보와 동아방송(DBS)의 기자와 피디, 아나운서와 엔지니어 130여 명이 구사대 폭력에 의해 쫓겨날 때 최고참인 편집부 차장이었습니다. 간부 사원으로는 드물게 실천에 동참한 그는,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게 됩니다. 안종필 선생은 유신독재 때인 1978년,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습니다. 투옥 중에 암에 걸리고, 출소 두 달 뒤인 1980년 2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보도되지 않은 민주 인권사건 일지’의 줄임말인 민권일지 사건이 그를 긴급조치 위반으로 만들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1978년 10월 24일은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4년 전 요구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언론인을 불법 연행 감금하지 말라!’였습니다.

동아일보 해직 언론인들은 이 날 ‘동아투위 소식’을 배포했습니다. 제도권 언론이 외면한 125건의 사건 일지를 담았습니다. 이 소식지에는, 목숨을 걸고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한 종교인과 민주인사들의 외침이 빼곡하게 실렸습니다. 제도권 기자들이 덮는데 동의한 팩트를, 해직 언론인들이 전파하려 시도한 것입니다. 민권일지 사건으로 안종필, 김종철, 정연주 등 7명의 동아투위 위원들이 1년 반에서 2년 반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군사독재가 한 풀 꺾이는 1987년 6월항쟁 전까지는 권력의 힘이 자본보다 강력했습니다. 독재에 대한 비판도 공영언론이 아니라, 민영언론에서 주로 터져 나온 것도 이런 구조를 반영했다는 분석입니다.

하지만 동아투위 출신들 중 일부가 주도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련)가 ‘말’지를 통해 독재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하면서 판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6월 항쟁으로 시민의 힘, 특히 화이트칼라의 힘이 확인됐습니다. 일부 대학에서는 ‘일하는 사람들’ ‘새벽을 여는 사람들’ 같은 사무전문직 노동운동 동아리가 생겨났습니다. 대통령 직선제로 권력의 힘은 축소되고, 자본의 힘은 더 커져 갔습니다. 90년대 들어서도 권력의 저강도 언론탄압은 계속됐지만, 민영언론과 달리 공영언론의 저항은 눈에 띄게 커져 갔습니다. 2012년 ‘공정방송파업’에는 4개의 공영언론이 동참해 이를 뒷받침했습니다. 정권은 바뀌지만, 대주주가 있는 언론사 사주는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1975년 3월 17일 사옥에서 쫓겨났던 동아투위 선배들은 요즘도 매달 17일 정기모임을 엽니다. “어떻게 민통련을 하고, 말지를 창간할 생각을 하셨어요?”라는 질문에 “…정권이 방해하니, 취업을 할 수가 없었지” 라고 답하십니다. 어느덧 평균 나이가 팔순에 육박한 동아투위 언론인들. 4월 모임의 주된 관심사는, 한 민영언론이 해당 언론사 모기업의 비리의혹을 직접 보도한 것이었습니다. 44년 전 과는 달리, 해피엔딩이 되기를 바라는 듯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