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한 릴레이] 장서가의 괴로움

[만만한 릴레이] 장서裝書 가의 괴로움

SBS A&T 양두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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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잘 드는 책방
송나라 학자 구양수의 시필試筆에 ‘명창정궤明窓淨机’라는 구절이 나온다. 채광이 잘 되는 밝은 창과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무릇 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이만큼 명징한 호사는 없을 터. 물욕은 없는 편이라 자처하는 나 역시 책이라면 중독이라 할 만하니 천장 높고 채광 좋은 방을 책장으로 둘러놓고 세속과 단절되어 스스로 위리안치圍籬安置한 채 활자를 파고 있는 모습을 언제나 상상만 한다. 그 정도의 방을 서재로 쓰려면 집의 크기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 서울에서는 힘들 테니 외곽으로 나가야 할까, 책장은 원목이어야 하나 따위의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상상 속에서만은 즐거운 일이리라.

장서의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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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아니, 책에 중독된 이들이 공통으로 겪는 증상들이 있다. 한 번 샀던 책인데 시간이 한참 흐르고 기억이 흐릿해진 후 있는 줄도 모르고 다시 같은 책을 사버렸다. 서가에 두려고 보니 보란 듯이 꽂혀 있는 바로 그 책. 또 하나, 어느 날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데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책꽂이를 보면 어디 뒀는지 알 수가 없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찾다 찾다 한두 시간쯤은 거뜬히 흐른 후에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 일본의 칼럼니스트 오카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에 보면 책을 사 모으다 보니 2층 다다미 바닥이 견디지 못해 내려앉으면서도 그 속에 파묻혀 죽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 정도면 중증이라고 욕을 먹겠지만, 나로선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한다.  무릇 장서가라면 그 정도의 비장미쯤은 있어줘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
책에 관련된 사건사고 역시 장서가라면 한 번쯤 있기 마련이다. 절판되어서 출판사에서조차 재고가 없는 <특명전권대사 구미회람실기>라는 책을 구한다며 글을 올렸더니 한 사내가 연락이 와서 책이 있노라 하여 의심 없이 돈을 먼저 보낸 적이 있다. 그러고 나서 감감무소식이기에 당했다 싶었는데 혹시나 해서 그의 계좌와 전화번호를 조회해보니 특이하게도 희귀한 책 구한다는 여러 사람에게 접근해서 동일한 수법의 사기를 치고 있었다. 구하기 어려운 책을 갖게 되리라는 기쁨에 들떠 정신을 놓아버리니 이런 일을 당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그래도 가벼운 편.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에서처럼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 초판본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을 해치는 그 정도는 아니다. 웃음에 관한 책을 지키기 위해 책장에 독을 발라놓는 일은 더더욱 없다.

책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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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려보니, 내 책 중독의 역사도 나름 꽤 깊다. 그중에 백미는 아마도 책을 읽는 행위가 허락되지 않았던 군대 막내 시절이지 않을까. 취침 점호가 끝나고 화장실 양변기에 숨죽이고 앉아 <임화 연구>와 <장미의 이름>, <태평양전쟁 비사>를 읽으며 가슴 벅차했던 그때. 옆 라인에서 큰일(?)을 치르던 선임이 책 페이지 넘기는 소리에 깜짝 놀라 후임들을 전부 깨워서 얼차려를 주던 엄혹한 시절. 그 와중에도 라면과 건빵보다 책으로 가득 차 있었던 내 관물대 속. 지금은 돈이든 시간이든 없어서 못 사지는 않으나 어찌 보면 치기 어린 그때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결혼하고, 한 방에서 같이 살게 된 것은 비단 나와 아내뿐이 아니다. 수십 년을 쌓아온 우리 두 사람의 책들 역시 합방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쌓인 책들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다. 천여 권을 기증으로 보내놓고서도 어느새 또 그 자리를 채우고 마는 이것은 장서의 괴로움일지 아니면 장서의 즐거움일지. 후자라고 믿고 살자. 사람들이 내 책방의 모습을 보면서 열에 아홉은 꼭 하는 질문이 있다. “저 책 다 읽었어?” 이 사람들아, 저거 다 읽었으면 내가 교수가 되고도 남았지. 하지만 나는 침묵과 미소로 답을 건넬 뿐이다.
결국, 책 중독자의 운명은 어디일까. 지옥 중에 그런 지옥이 있다고 하더라. 생전에 사놓고 안 읽은 책 전부 들고 서 있게 하는 지옥. 그게 사실이라면 이두, 삼두 근력 운동만으로는 모자라듯 하니 사놓은 책 부지런히 읽어둬야겠다.

다음 주자로는 KBS 영상취재부의 최진영 기자를 지목한다. 최진영 기자가 기타를 잘 다룬다고 들었는데, 그의 ‘기타 이야기’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