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삶] 돌 속에 숨은 아스라한 그리움 남해 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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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김도식 기자

(보도본부 뉴미디어부 부장 )

 

이 산을 처음 만난 건 잡지 속 사진도, 신문 여행 코너도 아닌 이성복 시인의 시집 『남해 금산』이었다. 꼭 23년 전,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던 청년은 지금처럼 봄이 막 기지개를 켤 무렵 혼자 이 산을 올랐다.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날 내 삶의 한 부분을 빼앗아가 버린 이성복의 그 시집을 읽은 이후 명치 아래쪽에 늘 자리 잡고 있던 묵직함, 어떤 그리움 같은 것 때문이다.
해발 681미터, 기운이 넘치던 젊은 여행객에게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다. 물 한 통 준비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했으나 산은 생각보다 험했다. 바닷가이다 보니 말 그대로 해발, 사실상 바다 높이에서 시작하는 681미터였기 때문이다. 

갈증과 예상치 못한 험준함에 고전하다 쌍홍문을 만났다. 커다란 두 검은 눈이 등산객을 내려 보는 듯한 모양의 동굴은, 아무리 작은 산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깔닥고개의 끝에 자리잡고 있다. 정상으로 가는 관문인 셈이다.

쌍홍문을 지나면 보리암이 나온다. 낙산사 해수관음상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고 아담한 해수관음상이 있고 그 뒤로 아늑하게 앉아 있는 이 암자는 겉보기와는 달리 전국 3대 기도원 중 하나로 유명하다. 태조 이성계도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했다. 그 후 “왕이 되면 산 전체에 비단을 둘러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산 이름에 ‘비단 금’자를 쓰도록 해 금산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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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정상.
23년 전 나는 정상에서 숨이 막히고 말았다. 아직은 겨울 냉기가 묻어있는 찬바람 속에 따스한 봄 햇살이 깃들고, 그 햇살을 받은 하얀 바위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바위들은 모두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분명 눈에 보일 듯 말 듯 한 어깨춤을 두둥실, 소리 없는 장단에 맞춰 흔들어대고 있었다. 이곳은 바위들로 꾸며진 꽃밭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금산은 바위산이다. 화강암 바위로 이뤄진 산이다. 화강암, 바위 같은 단어들이 주는 남성적인 묵직함. 그러나 금산은 여성이다. 바위들은 화강암이되 작고 오밀조밀하고 포근하다. 게다가 봄 햇살까지 온몸에 받고 있으니 얼마나 따스하던지! 산 위쪽은 화강암이지만 아래쪽은 토산土山이어서 금산이 더 여성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누가 뭐래도 내게 금산은 여성이다. 시인 이성복이, 처음부터 그렇게 봤기 때문이다. 

 

지난해 겨울 다시 금산에 올랐다. 청년은 중년이 되었고 물 한 통 없던 젊은 배낭은 비상식량으로 가득한 노련한 배낭으로 바뀌어 있었다. 경외심을 갖고 오르기 시작했으니 젊었을 때보다 산행이 오히려 덜 힘들었다. 20여 년 만에 다시 오르면서 나는 꿈을 꾸고 있었던 듯하다. 그 시절 본 바위들의 어깨춤, 그걸 다시 보고 싶었다. 쌍홍문은 그대로였고, 보리암은 그 새 더 많은 명성을 얻어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해발의 높이에서 시작한 등산객과는 달리 보리암 높이까지 버스로 올라와 금산의 정상만 즐기다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기대와는 달리, 아니 걱정했던 것처럼 바위들은 어깨춤을 보여주지 않았다. 세상 모든 일들이 다 그렇다는 건 이미 아는 나이니까 섭섭할 것은 없었다. 그래도 금산 아닌가? 내가 사랑하는 금산! 23년 전과는 다른 눈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천천히 둘러보니 과거 청년이었던 나는 금산을 너무 급하게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 옆에서 본 금산, 산 아래에서 본 금산, 심지어 입구에서 멀리 본 금산은 마치 사랑하는 여인이 옷을 매번 갈아입듯 다른 자태로 내게 다가왔다. 바위들도 비록 춤을 추진 않았지만 더 앙증맞게 오밀조밀 앉아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소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멋진 금산의 바위 능선들을 한 눈에 보는 데는 아래 쪽 상사바위만 한 곳이 없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산은 그대로이지만 사람은 세월 따라 변한다. 아니 산도 변하는데 사람이 더 빨리 변하기 때문에 산은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사람도 그리 변하지 않는 게 아닌가 싶다. 아래 시를 보면 아직도 나는 남해 금산으로 달려가고 싶다. 봄 햇살을 받으며 바위들의 조용한 춤을 보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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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하루라도 빨리 봄 산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남해 금산으로 달려가시라. 금산은 봄이 가장 먼저 오는 산이다. 거기에 날씨까지 좋다면 산 아래 몽환처럼 펼쳐진 상주, 그 멋진 다도
해의 섬들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