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과 교감하는 길, 내러티브_한겨레 안수찬 기자

16-1 내러티브 저널리즘

 

16-2 안수찬

내러티브 기사 쓰기를 후배들에게 독려하는 나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방송에 대한 경쟁의식을 자극하는 것이다. “내러티브만 잘 활용하면 뉴미디어가 우리한텐 기회야. 방송 기자는 내러티브 못하거든. 절대!”
내러티브는 위기와 관련 있다. 살아갈 방법이 궁한 활자 매체(신문과 인터넷) 기자들이 내러티브를 파고들고 있다. 얼마 전 한겨레 편집국장은 솔선하여 온라인뉴스팀의 ‘하루 데스크’가 됐다.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스스로 알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최근 1년 동안 여러 신문·인터넷 매체는 ‘인터랙티브 내러티브 기사’를 앞다퉈 내놓았다. 혁신은 위기를 품은 변방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반면 많은 방송기자들은 매체로서의 방송이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정치적)정상성’만 작동하면 소속사의 영향력이 복원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뉴미디어 시대에도 방송은 살아남을 것이다. 다만 방송 뉴스는 쇠락할 것이다. 방송 뉴스의 시청자는 이미 급감하고 있다. 주 시청자는 50대 이상 노령층이다. 나머지 세대는 방송을 봐도 방송 뉴스는 안 본다.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17-3 TELLING TRUE STORIES방송사는 원래 ‘스토리텔링 기관’이다. 다큐, 드라마는 물론 예능 프로그램까지 갖가지 스토리텔링 기법을 이미 구현하고 있다. 오직 예외가 있으니 보도국 기자들이다. 스토리텔링 기관에 있는 ‘스토리텔링 제로’ 인력이다. 이야기가 없으면 공감할 수 없다. 인간의 말글 형태 가운데 이야기가 아닌 것은 고작해야 역피라미드 기사, 판결문, 학술논문 정도다. 일상의 대화는 물론 신화, 경전, 역사, 문학에 이르기까지 절대다수의 말글은 이야기의 구조를 따른다. 그런 이야기 생산 능력을 갖춘 방송기자는 드물다. 그들은 무색무취한 짧은 리포트를 양산하는 쪽으로 진화(또는 퇴화)했다. 그들은 스토리텔링으로 무장한 각종 뉴미디어 콘텐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활용하는 방송기자조차 희귀하다. 이야기를 잘 못하는, 교감하지 않으려는 일체의 것을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것이 대통령이건 방송이건 기자이건 상대하지 않는다.

스토리텔링 기관에서 일하는 ‘스토리텔링 제로’의 기자

“진실한 이야기를 전하는(telling true story) 장르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내러티브 저널리즘, 뉴 저널리즘, 문학(literary) 저널리즘, 피처 기사(feature writing), 논픽션 소설, 다큐멘터리 내러티브 등이다.” 미국 하버드대학 부설 니먼 재단이 2006년 발행한 『진실한 이야기 쓰기』(Telling True Stories)의 서문에 나오는 글이다. 니먼 재단은 2000년 이후 내러티브 저널리즘 확산의 전초기지 구실을 했다. 그 작업에 참여한 60여 명의 기자와 학자들이 이 책을 썼다.

스토리텔링은 픽션과 논픽션 등 장르 구분 없이 두루 적용된다. 스토리텔링 방식의 코미디 프로그램도 있고 뉴스 보도물도 있다. 그런데 내러티브(저널리즘)는 논픽션, 즉 사실을 다루는 언론에서 주로 쓰이는 단어다. 진실한 이야기를 다루는 게 내러티브다. 문학 저널리즘은 영미 사실주의 문학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 찰스 디킨스, 마크 트웨인, 잭 런던, 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등은 기자로 활동하며 소설을 썼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들의 정신과 기법을 이어받되, (소설이 아니라) 사실만을 담는 기사를 쓰자는 게 ‘문학 저널리즘’이다.
뉴 저널리즘과 논픽션 소설도 비슷한 개념이다.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는 어느 시골 마을의 살인 사건을 6년여 동안 취재해 주간지 뉴요커에 연재했다. 뉴요커는 카포티의 글을 기사로 취급했지만, 카포티는 “오직 사실로 가득한 소설을 썼다.”고 자평했다. 나중에 단행본으로 나온 『인 콜드 블러드』는 ‘논픽션 소설’의 효시가 됐다. 이를 전범 삼아 문학과 언론의 통합을 추구했던 흐름이 1970년대의 ‘뉴 저널리즘’이다.
내러티브와 관련해 피처 기사가 거론되는 것은 의외일 것이다. 한국 기자들에게 ‘피처’는 말랑말랑한 인물 기사다. 영미 기자들에게 피처는 (속보로 내보낸) 현안에 대한 후속 보도(follow up news)이자 사실 이면의 심층(news behind news)을 인물 중심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논픽션, 사실주의 문학, 피처 등에 흩어져 있던 흐름을 니먼 재단은 ‘내러티브’라는 개념으로 묶어 정돈했다. 같은 책 서문에서 내러티브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가 ‘내러티브 논픽션’ 또는 ‘내러티브’라 부르는 이 장르는 인간의 사안(human content)에 학문적 이론(academic theory)과 관찰된 사실(observed fact)을 혼합하여, 매일의 사건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돕고, 복잡한 세계의 메시지를 해독하고 정돈해준다.” 그리하여 내러티브 기사는 전모를 드러내는 데 주력한다. ‘알다’라는 뜻의 라틴어 gnarus에서 비롯한 내러티브narrative에는 ‘전모를 알도록 설명한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여기서 내러티브는 탐사보도와 만난다. 전모를 드러내려면 전모를 추적해야 하는 것이다.
18-4 SNOW FALL

내러티브는 뉴스의 생명주기도 연장시킨다. 1년 전 사건을 오늘 보도할 수는 없다는 게 전통적 뉴스관이다. 그런데 그 사건 관련자가 지금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면 당연히 뉴스로 다뤄야 한다는 게 내러티브의 접근법이다. 이 때문에 영미 내러티브 기사는 몇 달은 물론 몇 년에 걸친 시공간을 다룬다. ‘오늘 발생한 새로운 사건’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뉴스의 영토를 모든 사람의 모든 일상으로 확장시킨다. 하찮은 뉴스를 다룬다는 뜻이 아니다. 내러티브는 필부의 일상에 숨겨진 구조와 맥락을 드러내어 고발한다. 물론 일상은 그 의미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기자는 장기간에 걸친 집요한 관찰을 통해 사실을 수집하고(observed fact), 이를 분석하는 개념·범주·이론을 토대로(academic theory), 인간의 일(human content)을 기사에 옮긴다. 그 방대한 내용은 가장 강력한 말글 형태인 이야기 또는 문학을 차용해 전달한다.

엘리트의 언어에서 대중의 언어로

내러티브,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역피라미드는 현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현재 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혀 있는, 악마이자 비열한 여자, 발푸라 하우스마닌은 고문과 함께 진행된 진지한 추궁 앞에서 그녀의 마법을 고백하고 아래의 사항을 인정했다. …” 16세기 유럽 상인들이 돌려 읽던 필사 신문 핑게르자이퉁엔에 실린 기사의 첫 단락이다. 오늘날 역피라미드 기사의 전형적 형태와 일치한다. 반면 1699년 영국의 신문 런던 스파이에 실린 기사의 한 대목은 1인칭 소설을 연상시킨다. “… 중후한 건물이 눈에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재잘거리며 떠들었다. 나는 그것이 시장이 사는 궁전이라고 생각했다. 동료는 내 순진한 추측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건물은 미친 이들을 위한 병원이라고 알려주었다. …”
정보에 집중하는 기사와 이야기에 비중을 둔 기사는 오랫동안 길항했다. 20세기 초, 균형추가 기울었다. 미국 언론학자 마이클 셔드슨은 19세기 후반 미국 언론에서 뉴욕 월드의 ‘이야기’와 뉴욕 타임스의 ‘정보’가 경쟁했고, 전자는 중간층 및 노동대중에게, 후자는 지식층과 연결돼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야기는 대중의 장르였고, 정보는 엘리트의 장르였다. 이 경쟁에서 뉴욕 타임스가 승리한 데에는 20세기 초반의 (실증주의) 과학의 영향이 컸다. 미국 기자들은 편견 없이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과학의 이상에 매료되어 그 방법론을 따랐다. 1960~8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 언론은 관료화됐고, 취재과정과 기사작법은 역피라미드를 중심으로 규격화됐다. 역피라미드는 ‘사람의 언어’가 아니라 ‘(엘리트적) 과학의 언어’였다.
신문과 방송에서 밀려난 ‘이야기의 기사’는 뉴요커 등 주간지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 재해석됐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주류 언론이 돌파구를 모색하다가 뉴저널리즘, 문학저널리즘, 논픽션소설 등을 발견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하버드대 니먼 재단은 ‘내러티브 저널리즘’의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오늘날 미국 신문 기사의 20%가 내러티브의 작법을 따른다는 조사 자료를 본 적이 있다. 퓰리처상 언론 부문은 모두 14개 분야가 있는데, 탐사보도, 피처기사, 해설보도, 국제보도, 국내보도, 지역보도 등 수상작 대부분이 내러티브 기사다. 미국 미주리주립대학 저널리즘스쿨이 발행한 『뉴스 리포팅과 기사작성』(News Reporting and Writing)을 보면, ‘역피라미드 기사’를 소개한 분량의 2배 정도가 내러티브 등 ‘역피라미드 기사의 대안’이라는 항목에 할애돼 있다. 퓰리처상 수상작, 그리고 교과서에 예시된 내러티브 기사를 보면, 기사의 서두에서 취재계기·취재과정·취재원 등을 투명하고도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 본문은 담담하고 무미건조한, 주관적·감정적 표현을 최대한 덜어낸 문장으로 구성돼 있다. 역피라미드보다 내러티브가 공정성·정확성 등 언론의 규준에 더 부합하는 기사라고 영미 기자들은 믿는다.
대중으로, 그리고 심층으로, 풍부하게 또한 정확하게 언론을 혁신시키려는 에너지가 내러티브 저널리즘에 담겨 있다. 모든 콘텐츠의 기본은 이야기이고, 이야기의 수용성·확산성·변형성은 강력하다. 활자·그림·영상의 포맷으로 스스로를 변화시켜 종이·디지털·스크린을 넘나든다.
그 진화의 속도는 위기의식만큼 빠르다. ‘과학의 기사’를 추구했던 뉴욕타임스는 이제 ‘이야기의 기사’에 있어 선두주자다.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에 뿌리를 두는 내러티브 기사는 인터랙티브 내러티브로 진화했다. 뉴욕타임스의 ‘스노우폴’은 일상적 사건을 심층 탐사하여 장문의 내러티브 기사, 인포그래픽, 영상 등을 버무렸다. 그것은 고품격 다큐멘터리와 닮았다. 앞서 니먼 재단이 적시한 내러티브 저널리즘의 여러 변형 가운데 ‘다큐멘터리 내러티브’가 있었다. 영상 분야의 내러티브 저널리즘을 극대화하면 뉴스 다큐멘터리를 만나게 된다.
내러티브를 파고드는 활자 매체 기자들의 꿈이 있다. 하나의 사건을 단행본의 분량과 품질을 갖춘 기사로 쓰는 일이다. 내가 방송기자라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하나의 이슈를 다루는, 담담하고 냉철한, 흥미진진하면서도 심층적인, 영화관에 내걸어도 손색없는 60분짜리 뉴스 다큐멘터리 제작에 기자 인생을 걸겠다. 이제 단신과 다를 바 없는 리포트 따위 누가 볼 것이며 뭘 담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 이 글 가운데는 졸저 『뉴스가 지겨운 기자』(삼인)에 등장하는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글에 인용된 책은 『Discovering the News』(M. Shudson), 『News Reporting and Writing』(The Missouri Group), 『Telling True Stories』(M. Kramer & W. Call) 입니다.

19-5 POWER OF NARR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