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삶] 늦은 휴가, 값진 일상을 속삭이다



MBN 황주윤 기자


나의 여름휴가는 항상 10월이나 11월이다. 처음에는 일이 바빠서’, ‘하필 휴가철에 뭔가가 터져서라는 이유로 휴가를 늦게 갔지만, 이제는 10월의 휴가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한여름 피서철에 떠나는 여행지에서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단기 여행자들만을 만나게 되지만, 휴가철이 아닌 이른바 여행 비수기에 여행을 하다보면 나와는 너무나 다른 환경과 처지의 장기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여름은 잔인한 계절이었다. 일과 일상, 양쪽 모두에서 극복하기 힘든 일을 겪었는데, 이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때 친구 한명이 지나가는 얘기로 한마디 던졌다. “동남아에 가서 스쿠버다이빙을 배우면 재미있대. 혼자 가도 여러 명이서 그룹으로 강습받는 거라 외롭지도 않다는데?” 이건 뭐 조언도 아니고 자신의 경험담도 아닌, 어디서 들은 풍문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4일 뒤인 10월의 어느 날, 나는 인천공항 출국장에 서 있었다.


목적지는 태국. 방콕에서 가장 저렴한 한국인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몇 년간의 여행에서 나의 숙소는 언제나 한국 배낭여행책자에 나오는 게스트하우스다. 여행이 주는 즐거움 중에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는 것을 중요하게 꼽는 사람도 있지만, 영어가 짧은 나는 외국인과 가까워지기도 쉽지 않았고 행여 어찌어찌 친해져서 이메일 정도 주고받는 사이가 된다고 해도 한국에 와서까지 그 관계가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한국인 게스트하우스에서 새로운 환경의 사람들을 만나 남의 눈치 따위 보지 않고 내 얘기를 풀어놓는 것이 좋았다. 매일 보는 선후배나 친구들에게는 할 수 없는 얘기들을 여행지에서는 안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타인에게 서슴없이 풀어놓았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 당시 난 성공한 사람에 지쳐있었던 것같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브리핑에 인터뷰에, 남의 얘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인위적 집중에 피로감을 느낄 무렵이었다. 하지만 방콕의 싸구려 게스트하우스를 거쳐 스쿠버다이빙을 위해 외딴 섬으로 가는 여정에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연히 나와 행선지가 같은, 경기도 안산의 어느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호식이라는 동갑내기 친구와 동행을 했는데, 우리는 14시간 동안 각자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만 하고 듣기 싫은 얘기는 안 듣는, 데면데면하지만 편안한 분위기로 꼬따오라는 섬에 도착했다.


방콕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딴 섬 꼬따오에서 나를 맞이한 사람들은 20대 초중반의 한국인 다이버들이었다. “그냥 여행하러 왔다가, 바다가 너무 좋아서, 다이빙이 너무 좋아서 눌러 앉았어요입에서 한국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영락없는 현지 원주민이었을 청년이 나의 다이빙 강사였다. 부산의 어느 대학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2년째 꼬따오에 머물며 다이빙샵에서 일하고 있다는데, 이 외에도 여자들을 포함해 10여명의 한국인 다이버들이 해변 앞 작은 다이버샵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름도 못 들어 본 태국의 어느 섬에 한국인 젊은이들이 그렇게 많다니모두들 여행을 목적으로 왔다가 다이빙에 취미를 붙여 하던 일을 정리하고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이었다.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다 온 친구, 대학을 다니다 잠시 휴학한 친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짜고짜 일자리를 찾아 동남아로 떠나온 친구나의 편협한 일상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값진 청춘들이 여기 모여 있었다.


서울에서 기자 아가씨가 혼자 다이빙을 왔다는 사실에 이들은 나보다 더 즐거워했다. 낮에는 탈탈거리는 50cc 오토바이에 나를 태워 바닷가를 따라 섬을 둘러보고, 밤이면 고기를 꼬치에 끼워 직접 모닥불에 구워 맥주와 함께 즐겼는데, 과연 이들에게 근심이라는 게 있을까 싶어 내가 물었다.


한국에 있는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아요?”


한번 다녀오려면 비행기 값이 40만원인데 그 돈이면 여기서 두 달은 지낼 생활비거든요. 데 뭐 여긴 인터넷도 잘되고지금은 그냥 여행도 다니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려고요.”


그들과 함께 체험한 바다 속 세계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TV 속 다큐멘터리나 노래방 화면에서만 보던 색색깔로 물결치는 산호와, 물감을 칠한 것보다 더 아름다운 빛깔의 물고기들이 내 몸을 휘감고 떼지어 다니는 경험도 기이했지만, 그보다 더 경이로운 체험은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느낌이 꼭 하늘을 나는 기분과 같다는 것이다. 물속에서의 몸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 팔다리를 날갯짓하듯 움직이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자유라는 것에 형태가 있다면 꼭 이런 모습,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한창 사회에 나가 치열하게 일할 젊은이들이 이곳에 매료된 것은 바로 이 자유의 느낌 때문이구나 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휴가가 끝물을 향해가면서 나는 점차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나 내가 이들을 부러워하면서 다시 나의 일상에 돌아오기가 싫어지면 어쩌나.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맨 처음 여행을 떠나올 때의 기대 섞인 불안감, 그리고 그 뒤 경험한 꿈같은 시간들이 뒤엉켜 다소 불안정했던 심리상태가, 귀국 날이 가까워질수록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것이다. 정확히 어떠한 원인에 의해 그 같은 감정의 과정이 일어났는지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지만, “돌아갈 곳이 있다라는 의미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감했던 것 같다. 인생의 목적지를 찾아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유람하는 청춘도 빛나지만, 나처럼 이미 나의 일을 찾았고, 나를 기다리는 일터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값어치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마음의 짐을 바닷속에 내려놓고 내 일상의 소중함을 찾아왔기 때문일까,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한국으로 돌아가는 나의 발걸음은 가벼우면서도 든든했다.


소설가 김한길이 이런 말을 했다. 이별이 값진 것은 새것들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지는 헌것들과의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여행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것만이 여행이 아니라, 본래 내 자리의 소중함과 의미를 되찾는 시간이 바로 여행이다. 나는 올해에도 10월이나 11월쯤, 늦가을의 뒤늦은 휴가를 계획 중이다.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느끼며 나를 돌아보고 싶다. 여행을 다녀온 뒤 마주하는 나의 일상은 또 얼마나 더 값져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