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휴가] 생각 다이어트_KBS 유원중 기자

나는 지난해 1년간 안식년을 보냈다. ‘존 뮤어 트레일’(John Muir Trail: JMT)은 내가 경험한 최고의 여행이었지만, 짧은 여름 휴가 기간에 갔다 올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어서 결국 동료들에게 자랑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함까지 들 정도다.

‘세계 3대 트레일’이란 찬사를 듣는 곳. 미국 캘리포니아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요세미티 계곡에서 휘트니산(4,400m, 알래스카를 제외한 미국 본토 최고봉)까지 340km를 걷는 길이다. 그럼 ‘존 뮤어’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미국 자연보호운동의 선구자로 ‘美 국립공원의 아버지’(자연보호를 위해 국립공원을 지정하도록 입법 운동을 펼쳤기 때문)로도 불린다. 세계적인 민간 환경운동단체인 ‘시에라 클럽’의 초대 회장이었다. 오솔길이지만 천하절경에 길을 내는 트레일 개척은 자칫 자연을 훼손하는 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JMT에는 누구나 이 길을 걷게 되면 자연에 흠뻑 빠지게 되고, 누가 얘기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연 보호주의자가 된다는 존 뮤어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한다.

미국에는 동부의 ‘애팔래치아 트레일’과 서부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PCT)라는 양대 트레일이 있다. 특히 최근 PCT 종주기를 쓴 책 『와일드』(저자: 셰릴 스트레이드)가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해졌는데, 20대 여성이 4,000km가 넘는 트레일에 도전하면서 자아를 찾아간다는 자전적인 여행 소설이다. JMT는 이 PCT 트레일 중에 핵심적인 한 구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이 책의 저자는 5월에 내린 폭설로 JMT가 폐쇄돼 이 구간을 생략했다. JMT는 이처럼 많은 눈 때문에 보통 4월부터 10월까지만 길이 열린다. 전 구간을 종주하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입산허가권을 동시에 받아야 하는데, 통상 1월에 인터넷으로 신청한 뒤 추첨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전 세계 백패커(봇짐을 지고 도보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지만, JMT를 종주할 수 있는 사람은 1년에 6백 명밖에 안 된다고 한다. 실제 산에 가면 이 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으나 이는 대부분 구간별로 걷는 사람들이다. 전체 구간을 한꺼번에 걸으려면 시간도 있어야 하지만, 행운도 있어야 한다.

회사 선배와 둘이 떠난 JMT를 완주하는 데 총 17박 18일이 걸렸다. 길을 걷다가 정말 거짓말처럼 흑곰을 만나기도 했고, 갑자기 나타났다가 도망치는 사슴은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일과는 그저 해가 뜨면 텐트 걷고, 먹고 걷고, 쉬다 걷고, 먹고 걷고, 또 먹고 자고, 가끔 씻기도 하는… 그런 것의 반복이었다. 1인용 텐트와 버너, 코펠을 모두 이번에 처음 사본 내가 ‘소위 선수들이나 한다는’ 이번 트레킹을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이리라. 내일 펼쳐질 고생이 어떤 것인지 예상을 하지 못했기에 그냥 하루하루를 힘차게 시작했다가 시체가 돼서 잠이 들기를 반복하며 견뎌냈다.

하지만 나도 40대 중반. 20대 여성인 셰릴 스트레이드와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으리라…. 월급의 60%를 포기하고 얻은 안식년에 난생처음 도전해 보는 340km 백패킹…. 하지만 현장에서의 나는 정말 어이없게도 그 단순한 일과 속에서조차 아침에 점심 먹을 것을 생각했고, 다리가 아프면 쉴 곳을 찾았고, 저녁이 되면 추위를 견딜 방법을 고민했다. 삶에 대한 성찰보다는 생존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었다. 다만, 걷다 보면 돌부리에 차이는 순간처럼 가끔씩, 찰나의 순간에 몇 가지 생각들이 스쳐 간다. 매우 적은 수의 생각, 그것이 아마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일 것이리라…. 야생을 한다는 것은 속세의 수많은 잡념 속에서 내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를 알려주는 것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내 일과는 단순했지만, JMT는 지루할 틈이 없을 만큼 계속 감동을 전해준다. 하프 돔으로 유명한 요세미티 구간의 엄청난 암벽, 바위를 뚫고 나오는 엄청난 크기의 나무들, 추상화를 연상케 하는 번개에 맞아 타버린 나무들…. 이게 지루해질 만하면 엄청난 크기의 호수와 그 주변의 오아시스 같은 초록색 풀밭이 또 장관을 연출한다. 맑은 호수에는 송어가 헤아릴 수 없이 보이고 낚시도 할 수 있다. (낚시 허가권을 구매해야 하지만 ^^) 나무도 호수도 다 지루해지고 나면 최고봉 휘트니산을 앞두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볼 수 없는 흙과 바위만 있는 거대한 민둥산들이 펼쳐진다. 마치 화성에 온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끝으로 4,400m에서 바라보는 대륙의 일출. 매일 밤 불가에 모여 앉아 얘기했던 동병상련의 낯선 친구들. ‘존 뮤어 트레일’을 버킷 리스트에 넣어 두길 ‘강추’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 한 가지. 전 구간을 통틀어 3~4번 정도 산이 아닌 인공의 도로변 휴게소나 산속 오두막 리조트, 목장을 만날 수 있다. 이런 곳이 바로 트레일을 포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탈출구다. 트레일을 시작한 지 3일 차! 나는 어깨가 끊어질 것 같은 아픔 속에서 반나절 동안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어떻게 이 트레일을 포기하고 먼저 LA에 가 있겠다고 선배에게 말을 꺼낼까….’ JMT의 첫 번째 탈출구인 도로변 휴게소에는 간이 우체국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배낭을 모두 풀고 다시 한 번 필요 없는 물건을 정리했다. 그리고 2백 달러가 넘는 거금을 주고 한국에 부쳤다. 만능 칼 1개, LA에서 입을 반바지 반팔 1개, 코펠 큰 것 1개, 모자 1개, 손바닥만 한 건조 쌀 1봉지의 무게는 모두 합쳐 불과 1.5kg. 이 무게를 빼니 신기하게 가방이 가벼워진다. ‘1kg이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무게’라는 말의 뜻을 알게 됐다. 내 몸무게는 17일 동안 8kg이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