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지] 내가 추천하는 여행지 10선_MBC 남형석 기자

”아바나는 볼 게 없어. 그저 폐허가 된 도시일 뿐.”
쿠바 여행을 앞서 다녀온 친구의 한 마디였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 M.B.A 과정을 밟고 있는 전도유망 엘리트 친구였다. 잠시 망설인 뒤, 나는 귀를 막고 떠나기로 했다. 무려 나의 ‘신혼여행’이었다. 신부에게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거창한 기억을 선물하려면, 아무래도 에메랄드빛 해변의 휴양지만이 정답은 아닌 듯했다. 무엇보다, 촉이 왔다. 이곳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모히또, 시가와 럼의 고향,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그리고 체 게바라,.. 3개월의 꼼꼼한 준비 과정을 거친 뒤, 26시간 하늘길을 헤엄쳐 밤늦게 도착한 쿠바 수도 아바나. 전력 부족으로 밤이면 까만 도화지처럼 변해버리는 이 오래된 도시에서, 신혼부부의 무모 무쌍한 허니문은 시작됐다.

가난의 풍경, 가난하지 않은 풍경
친구의 말은 맞았다. 온통 낡은 것 투성이인 도시. 우리가 묵은 민박집부터 1800년대에 지어졌단다. 낡고 부서진 건물들, 굴러가는 게 신기할 따름인 자동차들, 세계 각국에서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옷을 초췌하게 걸친 사람들. 눈으로 본 풍경은 머리로 배운 ‘가난의 정의’와 맞닿아 있었다.
며칠을 푹 머물면서, 폐허처럼 보인 거리에서 수상한 점들이 발견됐다. 먼저, 거지가 없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노숙자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또 한 가지. 도로와 항만, 의료시설과 학교는 웬만한 선진국 수준으로 깔끔하게 정비돼 있었다. 또 쿠바에서는 5세부터 대학 졸업까지 무상교육을 받고, 전 국민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다. 그리고 무주택자에게는 공동주택을 제공하므로 ‘홈리스homeless’도 없다. ‘다 같이 가난하지만 굶어죽는 이는 없고, 모든 국민이 최소한의 복지 혜택은 누리고 있는 나라.’ 그것도 미국의 50여 년에 걸친 경제 봉쇄와 구소련의 지원 중단이란 최악의 상황에서 유지하고 있는 틀이다.
눈이 아닌 가슴에 담은 아바나가 결코 폐허일 수 없는 이유는 음악이다. 이 도시는 온통 음악소리로 가득하다. 공원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70대 노인의 손에도 오래된 기타가 들려 있다. 어스름밤이 되면 바bar에서 새어 나오는 늙은 가수의 ‘Guantanamera(관타나모의 여인)’를 들으며 낡은 골목을 누비는 것은 진정한 아바나 여행의 극치다. 구슬픈 현실을 잊기 위해 읊는 가락일지라도, 노래가 울려 퍼지는 순간만큼은 따뜻한 공기가 온 도시를 휘감는다.

자연이 빚은 근교 마을
아바나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갖가지 색깔을 담은 작은 마을들을 두루 둘러볼 수 있다. 먼저 꼬히마르. 하늘색 파스텔 톤으로 물든 작은 어촌이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상어를 잡으러 떠나는 노인과 반半쿠바인이었던 헤밍웨이의 우정이, 그들이 즐겨 찾던 레스토랑의 흑백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냘레스를 가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쥬라기 공원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거대한 원시림. 인디언들이 살던 동굴을 배를 타고 둘러보거나, 시가 농장 할아버지가 직접 말아주는 독한 시가 한 모금에 콜록거리는 것도 이곳을 방문한 자만의 특권이다.
마지막으로 바라데로. 이곳은 ‘달콤한’ 신혼여행을 과감히 포기해준 신부에게 바치는 회심의 선물이었다. 카리브해에서 즐기는 휴양과 해양스포츠의 천국. 쿠바에 이런 휴양도시가 있다는 건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니, 신부에게 한껏 ‘힘든 여정’을 빙자한 나로선 괜찮은 반전 카드가 아니었겠는가. 연인과 함께라면 꼭 가보길 권해 마지않는다.

가야 한다, 쿠바는, 지금
이제껏 이들의 삶을 항변해줬다마는,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미국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청년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일자리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현실. 꿈이 사라진 도시를 사는 젊은이들의 쓸쓸한 표정은 이곳을 잠시 스쳐가는 내가 감당하지 못할 아픔일 터였다.
그런데 이제, 영원할 것 같던 그 쓸쓸함도 미지수가 됐다. 지난해 미국과 쿠바가 극적으로 수교에 성공하면서, 지난달(3월)에는 구글이 아바나 중심부에 첨단 온라인 테크놀로지 센터까지 열었다. 다시 말해, 나의 촉이 맞았던 거다. 그곳은 필경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곳이었다. 낡음의 미학이 흐르던 도시에는 이제 머지않아 스타벅스와 맥도날드가 들어설 것이다. 변화의 속도는 늘 인간이 감지하는 것보다 빠르다는 명제가 이 도시에서도 성립한다면, ‘여행자가 꿈꾸는 아바나’를 볼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래됐지만 지저분하지 않은 풍경, 굶어죽는 이가 없기에 가난이 낭만일 수 있는 유일의 도시, 아바나. 텅 빈 혁명광장에 새겨진 체 게바라의 거대한 초상만큼이나 순수하고 열정적인 이 땅을 등지고 돌아오며,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신혼여행을 마친 우리 부부는 단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제 막 시작하는 우리 둘. 아메리칸드림처럼 젊음을 열정해도, 먼 훗날엔 쿠바처럼 늙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