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물] 기억의 선물, 선물의 기억_YTN 최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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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신혼인데, 우리 집에는 보내지 못한 선물이 가득합니다. 중고 책방에서 산 문고판 책, 카페에서 발견한 크리스마스 양초 같은 자잘한 것들인데, 제 습관 때문에 집에 들어왔다가 주인을 만나지 못한 물건들입니다. 길을 가다가 문득 누군가를 생각하고 사 놓고선, 결국 시간을 못 내거나 때를 못 맞춰서 바로 주지 못해 간직하고 있는 선물들입니다. 숫자가 점점 늘다 보니 선물을 사둔 사실도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사두고 주지 못한 선물도 있지만, 주고 잊어버린 선물도 많습니다. 가끔 “네가 선물했던 시집이 있더라.”하고 지인에게 불쑥 전화를 받곤 합니다. 주로 이사를 앞두거나 끝낸 사람들인데, 책장 구석(아마도 아주 깊숙이)에 꽂혀 있던 시집을 뒤늦게(아마도 몇 년 만에) 발견했다는 거죠. 누가 전화를 하든지 무척 반가워서 모처럼 즐겁게 대화합니다만, 제가 준 시집이 뭔지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게 문제입니다.

단골 책방에서 그날그날 마음에 든 책을 뽑아 선물한 탓에 각자에게 뭘 줬는지 통 기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나마 마종기나 나희덕, 기형도처럼 몇 안 되는 시인들의 시집을 주로 선물한 덕에 두어 차례 기억을 더듬다 보면 ‘아! 그때 기형도의 「대학시절」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 하고 선물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줘야 하거나 손에서 떠난 선물을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받은 선물은 신기하게도 잘 잊지 않습니다. 제가 태어나자마자 받은 거의 최초의 선물부터, 가장 최근에 받은 결혼 축하 편지까지 모두 볼 때마다 마음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주지 못한 선물도 많은데, 버리지 못하는 선물이 더 많은 탓에 제 방 한쪽은 항상 어수선합니다. 저는 이 어수선함 속에서도 나름 골동품 가게를 둘러보는 듯한 재미를 느끼지만, 아내의 입장에서는 그저 ‘창고정리’ 표시라도 붙이고 싶은 마음일 겁니다.

71받고 쌓아둔 선물 가운데 제가 가장 오랫동안 아껴온 건 나이에 맞지 않게도 인형입니다. 30년 전 외증조할아버지께서 제 첫 생일 때, 회색 강아지 인형 ‘똘똘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렸을 때 늘 인형을 끌어안고 잤을 정도로 좋아해서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늘 잠자리 가까이에 두는 물건 중 하나입니다. 몸을 흔들면 나던 ‘딸랑’ 소리가 약해지긴 했지만, 거의 처음의 외모를 간직한 이 인형 덕에 저는 늘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선물과 기억 사이의 인력引力 자체가 큰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입사 최종 전형을 막 마쳤을 때쯤, 지금의 아내와 세 번째로 만나던 날이었습니다. 정식 연애를 시작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날 받은 선물에 저는 말 그대로 아내에게 이끌려 넘어갔습니다. “기자되면 아무래도 쓸 일이 많을 것 같아서….”라며 건넨 선물은 제 이름이 새겨진 고급 볼펜이었습니다. ‘사전취재’로 알아낸 영어 이니셜에도 놀랐지만 아직 수습도 시작하지 않은, 말하자면 아직 사람도 되지 않은 저의 앞날을 마치 이미 예상했다는 듯 준비한 선물이었기 때문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현장 취재할 때 이 펜을 들고 다니면서 ‘동그라미’를 그리거나 ‘밑줄’을 그으며 화면에 등장시키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이 선물을 치밀하게 준비한 회심의 한 방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속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받은 한 선물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남들보다 헤매던 수습기자 시절을 겨우 지나 결혼을 결심한 후배에게, 선배께서 주신 축하 편지 한 통입니다. 몇 달 만에 인간애와 낭만 따위는 없다고 단정 지어버렸던 언론계 생활, 까마득한 후배를 따뜻하게 생각해 주시는 그 마음이 저를 반성하게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을 쉬이 열기 어려우셨을 선배들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알아서, 또 더 시간이 흐르기 전 한참 아래의 후배를 한 번이라도 더 다독여 주시려 한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감사했습니다. 저 또한 앞으로 더 많은 동료들을 늘 기억하고 바라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 선물이었습니다.

기억이 선물이 되고, 선물이 기억이 되는 이 단순한 원리를 이제야 되돌아봅니다. 가끔은 집에 쌓여있는 선물들을 보면서 죄책감과 부담을 느끼기도 했는데, 더 많이 기억하고 더 많이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제가 생뚱맞게 어느 날, 선물하더라도 달갑게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선물을 살 때만큼은 제가 잠시나마 당신을 떠올렸다는 게 ‘팩트’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