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삶] 나는 지금도 고래사냥을 꿈꾼다


특집_ 나를 만든 책들


나는 지금도 고래사냥을 꿈꾼다
최인호 <고래사냥>


BBS 전경윤 기자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한다. 책을 읽으면 시대의 변화를 빨리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책 한 권이 잠자던 열정을 깨워 인생의 방향을 통째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꾸준히 책을 읽는 일, 결코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요즘같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두꺼운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읽어 내려가는 일 자체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꽤 있다.

내 자신도 평소 책을 즐겨 읽는 스타일이 아니다. 기자로서의 생활과 매일 아침 2시간씩 진행하는 시사 프로그램(BBS 전경윤의 아침저널)때문에 시간 내기가 쉽지 않다보니 책 한 권에 푹 빠져있을 만한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죽치고 앉아서 긴 시간 책 삼매경에 빠졌던 경험,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랫동안 책을 가까이 하지 않다보니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책이 무엇이냐고 누가 물어보면 몹시 당황하게 된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면 책도 제대로 읽지 않아 교양이 없는 사람으로 비쳐지지나 않을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꽤 수준이 있어 보이고 어려운 내용의 책 이름을 들먹이며 고상한 척하는 위인도 못 된다.

과연 살아오면서 내 마음을 움직인 책,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을 만들어준 책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 이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그렇다. 인생 자체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어도 당시 나의 정신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책이 분명히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책은 소설이나 시집일 수도 있고 교양 인문서일 수도 있다. 동서양의 우수한 고전들도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움직인 책은 소설이었다. 바로 최인호 작가의 ‘고래사냥’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잔잔했던 내 마음의 호수에 날아든 돌멩이 하나였다고 보면 된다.

사실 고래사냥은 책보다 영화로 먼저 만났다. 1984년 어느 날, 중학교 3학년이던 나는 친척집에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청량리 오스카 극장(아쉽게도 지금은 없어짐)의 대형 간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창호 감독 연출에 안성기, 이미숙, 김수철 주연의 영화 고래사냥의 상영을 알리는 간판이었다. 학교와 집만을 오가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이 혼자 극장에 들어갔다. 당시 동경했던 대학 생활을 영화를 통해서나마 엿보고 싶었던 마음도 강했던 것 같다. 소문대로 영화는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안겨줬다. 2시간 가까운 상영시간 내내 때로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때로운 눈시울을 붉히기를 반복했다. 극장을 나오자 마치 자유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거리를 이러저리 쏘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영화를 보고 나니 최인호의 원작 소설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하지만 입시를 앞둔 중 3이라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원작 소설을 바로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고입 연합고사를 무사히(?) 치른 뒤 그해 초겨울에 소설 고래사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고래사냥의 주인공 병태는 서울의 모 대학 철학과 3학년으로 작고 병약한 몸에 뚜렷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데다 좋아하는 여자 친구에게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소심한 대학생이다. 숱한 방황과 괴로움 속에 대학생활을 하던 병태는 학교와 집을 나와 뜬금없이 고래를 잡겠다며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 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민우’다. 그는 집도 없는 부랑자로 거지 생활을 하지만 조금도 초라해보이지 않는다. 밤에는 고궁이나 동물원에 몰래 들어가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고층 빌딩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뒤 세면과 면도까지 하는 민우의 모습에서 자기 스스로 선택한 자유인의 삶이 오히려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병태는 민우의 생활에 빠져들면서 자유를 만끽하게 되고 당당하고 자신있게 사는 법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두 사람은 사창가에 팔려온 벙어리 처녀 춘자를 구출해 고향까지 데려다주기로 하고 긴 여정에 오른다.

이 소설의 제목은 왜 고래사냥일까 ? 소설에서 병태는 고래를 잡으러 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벙어리 창녀 춘자가 80년대 군사 독재 시절 억압받던 민중을 상징한다면 고래는 민중해방이라는 정치적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소심한 대학생 병태가 말한 고래는 숨막히는 제도권과 기성 질서를 거부한다는 의미와 함께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운 순수와 이상향, 진정한 삶의 자유와 해방을 뜻하는 것이라고 본다.

고래사냥이라는 소설을 읽고 난 직후에는 학교와 집을 벗어나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기존의 제도와 질서,우리 사회의 엄숙주의,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감도 커졌다. 강산이 두 번 바뀌고 세 번째 바뀌어가는 지금도 나는 참된 자유와 진정한 마음의 해방을 꿈꾼다. 10대 시절이나 40대가 된 지금이나 정해진 규율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은 여전히 강렬하다. 그러나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시대는 왔지만 병태가 그토록 찾으려했던 고래는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가 더욱 어려워진게 아닌가 싶다. 고래사냥 노래 가사처럼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기 때문’이 아닐까 ?
우리에게 고래를 잡으라고 외쳤던 최인호 씨는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지난 2천 8년 침샘암에 걸려 3년째 투병중인 최 씨는 항암 치료 후유증으로 손톱과 발톱이 빠지는 고통속에서도 최근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라는 새 소설을 발표해 감동을 던져줬다.
최인호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 우리와 함께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를 잡으러 떠나야 한다.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지만 아직 고래사냥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