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삶] 나는 오늘도 플레이볼을 외친다


 


나는 오늘도 플레이볼을 외친다


 


BBS 전경윤 기자


 


 



 


방송국에 들어와 기자 생활을 한지도 어느덧 햇수로 18년째가 됐다. 생각해보면 본업 외에 취미 생활에 많은 시간과 정열을 바친 것 같지는 않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좋고 즐거운 취미가 특별히 있었다면 그 일에 푹 빠져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일만 생각하는 외골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젊은 시절 고달프고 힘든 생활의 탈출구가 돼주었던 취미, 분명히 있었다.


 


비록 내 인생의 꿈을 펼치는데 큰 역할을 했다거나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변수가 됐다거나 하지 않았지만 내 인생의 추억을 풍성하게 만들어준 것 가운데 하나, 바로 야구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인 1981년 당시 최고 인기 스포츠는 단연 고교야구였다. 박노준, 김건우가 버틴 선린상고와 류중일, 성준이 있었던 경북고가 맞붙었던 봉황기 결승전은 지금도 비디오처럼 당시 영상이 떠오른다. 초고교급 스타였던 박노준이 1회 홈으로 들어오다 발목이 접질려 병원에 실려가던 모습은 어린 시절 나에게는 큰 충격과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비운의 천재로 불린 박노준은 고교 시절 지나치게 혹사를 당했던 탓인지 이후 선수로서 크게 빛을 보지 못했지만 야구 해설위원을 거쳐 지금은 우석대 교수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81년에는 난생 처음으로 야구장을 갔던 기억도 생생하다. 한미 대학야구 선수권대회가 열렸던 동대문 운동장에서 친구와 야간 경기를 함께 관람했다. 지금은 철거돼 다시는 야구를 할 수 없게 된 동대문 운동장이지만 당시 대학생이던 김성한, 이만수, 박종훈 등이 푸른 외야 잔디를 뛰어다니던 모습은 10대 시절 소중한 추억의 한 자락으로 남아있다.


 


이듬해인 1982년은 프로야구가 출범한 해였지만 뭐니뭐니 해도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결승전 7회말이 잊지 못할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일본에게 21로 끌려가던 7회말 13루에서 김재박이 일본 투수의 높은 공을 개구리처럼 점프해 번트를 대는 장면, 이어서 한 대화가 좌측 폴대를 맞추는 역전 3점 홈런을 터뜨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그 뒤로 나는 야구에 매력을 느껴 본격적으로 야구장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 팬이었던 나는 고3때인 1987년 삼성과 해태의 한국시리즈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삼성은 장효조, 이만수, 김성래 등 쟁쟁한 타자들이 포진해 팀타율 3할을 기록할 정도로 막강 전력을 자랑했지만 정작 한국시리즈에서는 힘 한번 쓰지 못하고 해태에게 내리 4연패를 당해 허무하게 우승을 내줬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패배는 나에게 큰 충격과 허탈함을 안겨줬다. 당시 삼성 선수들의 프로필과 개인 성적을 줄줄이 외우고 다닐 정도로 광적인 팬이었기에 후유증은 오래 갔다. 대입 학력고사를 불과 두달도 채 남겨놓지 않은 나의 노트에는 온통 선수들의 타율과 타점, 홈런 수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당시 삼성이 졌지만 한국시리즈가 4차전에서 끝난 것은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팽팽한 승부가 펼쳐져 7차전까지 갔다면 그 해 대입 학력고사 성적도 곤두박질치지 않았을까?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의 야구 사랑은 여전했다. 같은 과 동기였던 김현욱(현재 삼성 라이온스 코치) 등 야구부 친구들과도 어울렸고 야구 유니폼까지 얻어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기도 했다. 부모님께서 영어 공부를 하라고 사주신 워크맨으로 정작 영어 공부보다는 야구 중계를 듣는데 여념이 없었다. 수업 중에 리시버를 꽂고 야구 중계를 듣는 묘미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당시 라디오 중계를 했던 전우벽, 이세진, 양진수, 김재영, 손석기, 유수호 아나운서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이름들이다. 지금은 모두 환갑이 훌쩍 지나 현역을 떠나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야구 현장을 지킨 산증인들과 만나 야구 이야기로 밤을 하얗게 새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당시 나는 저녁 8시가 지날 때 쯤 잠실야구장으로 가는 일이 많았다. 왜냐하면 7회말이 지나면 야구장에 공짜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7회말에 경기장에 들어갔더니 연장 15회까지 경기가 펼쳐지는 바람에 돈 한 푼 안들이고 2시간 가까이 야구 경기를 관람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당시 대학 친구들과 잠실야구장에 가면 투수의 공 하나 하나에 늘 돈 내기를 걸었다. 스트라이크 또는 볼, 안타나 파울, 삼진 등에 따라 푼돈이 오가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너무 내기에만 몰두해 정작 경기의 승패가 어떻게 갈렸는지 모를 때도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야구장은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던 20대 시절 나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하고 난 뒤에는 내 생활에서 야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들었다. 더구나 내가 좋아했던 삼성 라이온즈도 90년대 중반 이후 성적이 하락하면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자연스럽게 나의 관심은 해외 야구로 쏠리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 이승엽 선수가 일본에 진출하면서 일본 프로야구가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현미경처럼 세밀한 일본 야구는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인 나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졌다. 특히 일본 프로야구에는 한국계 스타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지 본인들이 불이익을 받을까봐 이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 프로야구 경기를 보면서 누가 한국계인지를 추정해보는 것도 꽤 흥미 있는 일이다. 보통 선수 이름에 가네(), 하야시(), 아라이(新井) 등이 들어가면 한국계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나의 야구 사랑은 이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야구에 대한 애정이 나의 뛰어난(?) 기억력과 합쳐져 프로야구 선수들의 각종 기록들을 머릿속에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가 됐다. 예를 들어 이승엽의 1997년 타율과 타점, 홈런은 각각 0.329, 114타점,32개라고 곧바로 대답하는 식이다. 그런 열정으로 고시 공부를 했다면 지금쯤 판검사나 고위 공무원이 됐을 것이라는 주변의 비아냥을 듣기도 하지만나에게 아예 야구에 관한 일을 직업으로 삼지 그랬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중에 프로야구 기록원이 돼서 전국의 야구장을 누비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10번 타석에 들어서서 3번만 안타를 쳐도 인정을 받는다. 홈런을 많은 치는 타자는 홈런보다 훨씬 많은 삼진을 당한다. 번트를 할 것인가, 도루를 할 것인가? 직구를 던질까, 커브로 공략할까? 공 하나 하나에 수많은 선택과 판단이 뒤따르고 조그만 실수에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도 야구의 묘미이다. 무엇보다 9회말 투아웃에도 극적인 역전 드라마가 연출되는 것이 바로 야구이다. 예측과 통계가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즉 의외성이 많은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예측 불가능하다. 그래서 늘 불안하다. 하지만 장쾌한 역전 만루 홈런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터져 나오는 한 방을 나는 믿는다. 오늘도 나는 외친다. 플레이 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