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란 이름] 그래도 속 편한 게 후배 노릇


그래도 속 편한 게 후배 노릇


험난한 앞선 걸음을 걸으며, 좋은 사람까지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SBS 최고운 기자


 


 




선배라는 말을 중얼거려 봅니다. 선배, 선배, 선배, 선배.


이번에는 사전을 찾아봅니다. 한자로는 先輩라고 쓰고 해석은 같은 분야에서, 지위나 나이학예(學藝) 따위가 자기보다 많거나 앞선 사람이라고 나오네요.


 


선배. 벌써 몇 년째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 달고 사는 말인데 소리 내서 발음해 봐도 사전을 찾아봐도 어색한 건 도대체 왜일까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선배님~!”하고 불러야 할 듯한데 자를 잘라먹어 그런 걸까요? 아마 자가 있든없든 간에 선배라는 단어가 주는 어떤 어려움, 편하게만 대할 수 없는 어색함과 함께 든든함, 고마움 등의 감정이 섞여있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학교에 다닐 때는 선배라는 말의 의미, 역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방송반이다, 신문반이다, 노래패다 뭐다 하면서 만난 언니 오빠, 동생들이 있지만 그냥 친하게 어울리는 무리일 뿐 어떤 역할을 요구받아 본 기억이 나지 않거든요. 성격 좋게 자주 웃고, 연애 상담 잘 해주고, 가끔 주머니를 털어 밥이나 술을 사면 멋진 선배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쉬운 방법이었다 싶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사람이 만나서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회사라고 별반 다를 게 있겠나 싶지만 선후배 사이에 이라는 놈이 파고들어 앉아 있으니 다를 수밖에요. 그래서 보통은 취재도 잘하고 기사도 잘 써서 모범이 될뿐더러 후배들과도 원만하게 지내는 사람을 좋은 선배라고 칭합니다.


좋은 선배의 정의란 대체 뭘까 고민하다가 제가 좋은 선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너무 뻔 한 이야기지만 역시 제일 먼저 꼽히는 건 성격입니다. 사실, 까칠한 사람은 좋은 선배의 범주에 넣어주기 어렵습니다. 고슴도치 후손도 아니고 무슨 말을 할 때마다 퉁명스럽다는 듯 또는 귀찮다는 듯 말하는 선배는 후배들을 참 힘들게 하니까요. 소탈하고 진솔한 대화를 청할 수 있을 만큼 적당히 푸근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을 따르는 건 당연지사. 가끔 말 수는 적어도 가끔 툭툭 치며 잘 지내냐물어주는 선배도 있는데 그럴 때도 잔잔한 정은 충분히 느껴집니다.


 


평소 어떤 단어, 어떤 말투를 쓰는지도 중요합니다. 기자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꼬질꼬질한 수습 기간을 거쳐 지금까지 오는 동안 오만가지 궂은소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래도 눈물 찔끔찔끔 짜기도 하고 들리지 않게 선배 욕도 적당히 하다보면 어느새 괴로운 기간은 다 지나가고 가까운 선후배 사이로 거듭나곤 하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다 잊히는 건 아닙니다. 저의 경우 아직도 떠올리기만 하면 기분이 상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모두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몇 마디 말이 원인입니다. 무조건 칭찬하고 치켜세우는 번지르르한 그런 말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줬으면 하는 거죠.


 


솔직함도 필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선배들과 일할 때 후배들이 하는 불평 가운데 단연 1등은 시키기만 한다.’ 일겁니다. 자기도 후배 시절이 있었을 텐데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이것저것 시키기만 하고, 심지어 후배들이 열심히 일 했는데 마치 본인이 한 것처럼 생색내면 후배들은 격분합니다. 물론, 소심해서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요. 그런데 저는 짐을 나눠지지 않는 것보다 나눠지는 척 하면서 사실은 안 그럴 때가 더 화가 납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 내가 요즘 일하기가 너무 싫다. 네가 다해라! 대신 내가 술 한 잔 사마.’ 이렇게 이야기 하면 괜찮은데, 일 하는 척만 하면 얄미움만 무럭무럭 커지더라고요. 아마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역지사지 해주는 배려심도 필요할 거고, 어떤 후배는 주린 배를 채워주는 넉넉한 인심을 원할 겁니다. 취재 하다 막혔을 때 시원하게 길을 터주는 경험어린 지혜와 지식도 후배들은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지금 제게는 올해 뽑힌 신입사원을 포함해 20명 가까운 보도국 후배들이 있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제가 적은 좋은 선배의 덕목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갖췄는지 모르겠네요. 하루하루 살아내기 급급하다는 핑계로 너무 돌아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후회가 됩니다. ‘나는 마음만 앞섰던 사람이구나.’ 하는 반성도 밀려오네요.


 


이렇게 쓰고 나니까 제가 좋아하고 따르는 여러 선배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앞길을 먼저 걸어가는 것도 험난하기 그지없는데 좋은 사람까지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일인지……. 시키는 일 꼬박꼬박 잘 하기만 하면 욕은 안 먹을 것이고 배고프면 밥 사 달라, 우울하면 술 사 달라 조를 수 있는 후배 노릇이 이렇게 편하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그냥 평생 후배 노릇만 하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