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삶] 그녀가 물었다. “마음속 빈자리가 있으신가요?”

54 그림_양효걸_그림

 

어디서나 한 번쯤은 보았음직한 이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작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입니다. 네덜란드 델프트 출생인 그는 고향에서 상인 계층의 일상을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남겼는데, 이 그림은 트로니Troni라고 불리는 초상화의 형식을 따른 다소 예외적인 주제의 작품에 속합니다. 얼굴이 빼어나게 예쁜 것도 아니고, 옷차림이 화려하거나 고급스러운 것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지만(그래서 이 작품을 모티브로 한 영화에서는 소녀의 신분을 하녀로 설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북유럽의 모나리자’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소녀의 미소가 지닌 소박한 아름다움은 많은 이들의 감정에 공명을 일으킵니다.

마치 방금 불러 세운 듯한 돌아보는 눈빛과 금세라도 뭔가를 말하려는 입술, 중앙에서 거칠게 반짝이는 진주 귀걸이는 노랑과 파랑의 이국적인 터번과 함께 소녀의 신비감을 더해줍니다. 아무런 설명도, 배경도 없는 검은 바탕 위에 이 소녀의 신비감은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넌 우리들에게도 강한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상상력이 덧붙여진 결과인지는 몰라도 살며시 돌아보는 소녀의 표정에서 수줍음이 읽힙니다. 수줍음이란 표현하고 싶어도 차마 하지 못하는, 때로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스스로도 판단이 서지 않는, 모호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합니다.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누구나 어릴 적 한 번쯤 느끼고 앓았을 감정들이지만, 지금 우리의 삶은 그러한 감정의 여백이 자리할 공간을 그다지 넓게 허락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회는 늘 빠르고 정확한 답만을 요구합니다. 늘 현재를 영위하기 위해 애쓰고, 내일을 대비해야 하는 숨 가쁜 일상에서 이런 여백은 쉽게 끼어들 틈은 없겠지요. 더구나 특히 요즘의 젊은이들은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 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한두 장의 서류 안에 가두며 고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림 속 소녀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고요함이 다가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버스가 오지 않으면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기다려야 했고, 통화가 되지 않으면 머리를 긁으면서도 수화기를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요즘은 손에 쥔 휴대전화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지요. 거의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환경이 되니,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궁금해 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가상의 공간에서 흘러넘치는 정보 중에서도 대중에게 선택받는 건 좀 더 날카롭고 자극적인 것들이고, 극단적인 감정들만이 살아남아 끊임없이 퍼져나가는 게 요즘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아주 뜨겁지도, 그렇다고 아주 어둡지도 않은 따스한 빛이 공간 가득히 흐르는 베르메르의 작품들은 보는 내내 편안함과 안식을 주곤 합니다.

특히 누군가에게 묻고 의심하고 확인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다 보니 사회의 밝은 모습보다는 어두운 모습, 만나서 기쁨을 나눌 사람보다는 서로 얼굴을 붉힐 만한 사람과 더 자주 만나고 부대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일상의 경험이 쌓일수록 마음속의 여백도 조금씩 지워져 가는 것이 아닌지, 그럴수록 우리 스스로 작은 여백을 만들어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