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그거, 그래도 괜찮았어’


<아듀 2010, 헬로 2011>



‘그거, 그래도 괜찮았어’



아내는 계획 짜기를 좋아한다. 새해가 되면 올해의 목표와 계획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눈앞의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주의인 만큼 답변이 궁색하다. 즉흥적으로 머리를 굴려 답해보지만 나오는 대답은 해마다 비슷하다. 금연과 규칙적인운동, 그리고 외국어 공부는 매년 빠지지 않는다(고 아내는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5번 항목쯤에 으레 “좋은 기사, 이른바 얘기되는 기사 쓰기”를 집어넣는다. 몇 달이 지나 체크해보면 다른 결심들은 연초에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 결국 5번만 살아남게 된다. 좋은 기사를 쓰기 때문에 5번이 살아남는 게 아니다. 1년이 다 지나기 전에는 좋은 기사를 쓸 가능성이 ‘논리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계속 살아남는 거다. 그리고 마침내 연말이 되면 5번 항목에도 X표를 그린다. 기억에 남는 기사가 한 두 개쯤이야 없을까마는, 썩 흡족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는 좀 특별했다. 나는 지난 5월 KBS 2TV 시사 프로그램인 ‘추적 60분’으로 소속을 옮겼다. 추적 60분은 본래 PD들이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추적 60분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기자가 된 셈이다. 개인적으로 김인규 사장의 취임에 반대했지만 어쩌다보니 그의 지론인 ‘기자-PD 협업’을 실천하는 충성스러운 사원이 되었다. 쫓겨나지만 않는다면, 내년에도 당분간 계속 충성할 생각이다.


많은 변화가 생겼다. 9시 뉴스는 기본적으로 출입처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 출입처에서 민감하고 뜨거운 뉴스가나오느냐 마느냐는 나의 의지와 거의 무관하다. 그런데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민감하고 뜨거운 뉴스를 일부러 찾아 가야하는 것이다. 간부들과 충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올 한해 간부들과 부딪힌 회수가 입사 이래 5년 동안 그랬던 것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많았다. 용산 참사 1주년, 이건희 회장 복귀, 삼성 반도체의 집단 백혈병 발병(여기까지는 취재파일 4321에서 했다.), 조현오 경찰청장의 막말 동영상, 천안함 논란을 다루면서 번번이 부딪혀야 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아이템을 한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게 계속해서 문제가 됐다.



옳든 그르든, 조직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정말 힘들다. 피곤하다. 특히 학창 시절 언제나 모범생이었던 나로서는, 윗사람과 부딪히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 어색하고 두려웠다.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면하는 건 결국 혼자서다. 누군가는 손가락질을 하고 누군가는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내가 모르는 사이 어디선가 내 얘기를 하고 있는것 같다. 원래 친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나를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하는지도 자신이 없어진다. 하나의 아이템을 하고 나면 피해망상과 비슷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데 꽤 시간이 걸린다. 다음에는 누구도 불편해 하지 않는 말랑 말랑한 아이템을 하겠다고 다짐해보지만 그게 맘처럼 쉽지는 않다.



그런데 마지막 달이 되고 보니, 나는 예의 5번 항목에 X표를 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이 보기는 어떨지 몰라도, 혼자서 조용히 되돌아보면 ‘그거 그래도 괜찮았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기사를 한 두 개쯤은 꼽을 수 있게 됐다. 공영방송의 기자로서 꼬리표처럼 달고 사는 자책감과 자괴감도 아주 조금 덜어졌다.


2011년이라고 특별할 것이 있겠는가. 나는 내년에도 아내에게 금연과 규칙적 운동, 외국어 공부를 목표로 제출할 것이다. 그리고 좋은 기사쓰기를 끄트머리에 슬그머니 덧붙여 놓을 것이다. 지칠까봐 두렵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는 아이템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잃지 않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