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이사장의 자격_윤태진 교수(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공영방송 이사장의 유명세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중요한 인물들이 있다. 대통령도 있고, 재벌 총수도 있고, 아이돌 가수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민이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는, 하지만 웬만큼 비중 있는 정치인보다 더 영향력이 큰 인물들이 있다. 국민 여론의 향배를 움직이고, 민주주의의 농도와 수명을 좌우하는, 또한 대한민국의 문화적 품격을 결정하는 공영방송사의 수장들이다. 이사장들이다. 실무적 책임을 지는 ‘사장’의 임면 제청권을 갖고 공영방송의 예·결산을 심의·의결하는, 나아가 직간접적으로 편성과 내용에까지 영향을 미칠 힘을 가진 이사회의 장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 매일 서너 시간 KBS와 MBC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과연 최근 십 년간의 KBS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이름을 몇이나 댈 수 있을까?
그런데 최근 들어 KBS의 이인호 이사장과 방문진의 고영주 이사장은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원로 사학자 이인호 박사는 언젠가부터 KBS의 이인호가 됐다. 훨씬 유명해졌다. 방문진이 뭐하는 조직인지 모르는 사람도 고영주 이사장 이름은 기억하게 됐다. 이 둘이 우리나라 방송계에 기여한 점이 있다면, 공영방송사의 이사장이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과 이사장의 결격 사유가 무엇인지 일깨워준 데 있을 것이다. 특정 이념을 널리 퍼트리겠다는 일념은 공영방송 이사장의 덕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이 둘만큼이나 유명해졌던 이사장이 있었다. 방문진의 김우룡 전 이사장이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 잘 듣는 사람’을 MBC 사장으로 임명했다고 자랑했다. ‘큰 집’이 사장 불러다 ‘쪼인트’ 까며 좌파 대청소를 시켰다고 밝힌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과연 공영방송의 이사장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를 고민하게 만든, 매우 의미 있는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 고민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이 이인호, 고영주 이사장이라는 사실은 허탈하기 짝이 없지만.

BBC, NHK, 그리고 한국의 공영방송 이사장
‘자격’이라 칭할 필요까지도 없다. 공영방송 이사장의 최소 기본 조건은 온갖 종류의 권력으로부터 공영방송을 보호하겠다는 사명감이다. 공영방송의 전형적 모델로 간주되는 영국의 BBC는 최근 몇 년간 심각한 비판과 위기를 경험했다. 보수당 정권은 (KBS 이사회에 해당하는) BBC 트러스트를 해체하고, 그 기능을 오프콤(Ofcom: 우리나라의 방송통신위원회와 유사한 기구)이 맡아서 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BBC의 독립성이 위협받는다는 징후는 여기저기에서 발견됐다. 그러자 BBC 트러스트의 로나 페어헤드Fairhead 회장은 지난 10월 17일, BBC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중단하라고 공개 경고했다. BBC의 미래는 밀실 속 정치인이 아닌, 편견이나 사익과 무관한 공중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는 점을 천명했다. 올해 초에도 “BBC는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영국 정치인들은 (BBC의) 독립을 열망하는 여론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큰 집’ 운운하던 김우룡 전 이사장이나 야당 의원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한 고영주 이사장, 정부에 비판적 프로그램 제작에 제동을 걸어온 이인호 이사장이 같은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있을까? 방송 제작 기준이나 보도 준칙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천박한 발언을 공개적으로 떠든 조우석 KBS 이사가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을까?
지난 2월, 일본 모미이 가쓰토 NHK 회장의 ‘위안부 망언’이 있었을 때 한국 언론은 일제히 극렬한 비난을 퍼부었고, 일본의 시민단체들도 모미이 회장의 파면을 요구했다. 작년 1월과 지난 10월에도 국수주의적인 위험 발언을 쏟아냈던 그이지만, 회장직 유지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KBS 이사회에 해당하는 NHK 경영위원 상당수가 ‘아베의 친구들’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하세가와 미치코, 혼다 가쓰히코, 나카지마 나오마사 위원 등은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시대착오적 인물들이지만, 아베 정권은 이들을 보호하고 우익 성향의 일본 국민 또한 이들의 발언을 용인하려 든다. 김우룡, 고영주, 이인호, 조우석 등의 인물들은 NHK 회장이나 경영위원들을 떳떳하게 비판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모미이 회장의 망언을 비난하는 한국 정부가 같은 잣대로 고영주 이사장의 망언을 비난한 적이 있던가?

‘독립 선언’이 필요하다
BBC 트러스트 이사진 선정에 적용하는 놀란 원칙(Nolan Principles)*을 되새길 필요도 없다. NHK 경영위원은 프로그램 내용에 관여할 수 없도록 명시된 일본 방송법을 강조할 필요도 없다. 평범하고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공감하고 동의할 정도의 이사진을 구성하지 못하는 것이 규정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호한 규정에 근거해 이사장이 된 후 공영방송의 품질과 품격, 공적 책임감은 모르쇠 하는 이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할 수 있는 이들만이 이사가 되고, 이사장이 돼야 한다. 독립성 보장에 실패한 순간 사임하겠다는 공개적 약속을 할 수 있는 이들이어야 한다. 이사회의 가장 중요한 업무인 사장 선임을 진행하면서 ‘반대파’를 배제한 채 최종 결정을 내리는 무책임과 무능력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포기한 결과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이는 ‘유명한’ 이사장이 아니라 ‘독립 선언문을 발표하는’ 이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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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 공직에 선출 혹은 임명되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7가지 원칙(사심 없음, 도덕성, 객관성, 책무성, 개방성, 정직성, 리더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