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 국정원과 ‘외눈박이 거인’ 검찰_SBS 권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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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국정원과 ‘외눈박이 거인’ 검찰

SBS 권지윤 기자(시민사회부)

지난 2008년 7월, 법원 기자실 앞에서 한 여성이 육두문자를 써가며 소리를 쳤다. 순화된 표현으로 바꾸면 “내 세금 받아먹으면서 이런 식으로 판결하는 게 법원이냐.”는 울부짖음이었다. 법조인 입장에서 생각하면 악성 민원인일지 몰라도, 적어도 내 기준에선 이 사람은 법치주의의 근간은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무신불립無信不立에 근거한 항의였기 때문이다. 국가의 공권력이 정당성을 상실하는 순간, 국가의 정통성도 민주주의도 무너진다는 것을 국민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빌려 쓰고 있는 검찰과 국정원은 이를 망각했고, 공권력을 이용해 증거조작을 벌였다.

간첩 잡기 어렵다더니… 위조·조작의 연속극

2월 14일 동계올림픽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증거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두 달 만인 4월 14일 검찰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한국과 중국, 심지어 국정원 본원 등 국내외에서 전방위적으로 증거조작은 이뤄졌지만, 국정원 수뇌부는 몰랐다는 게 요지였다. 3급 대공수사국 처장과 4급 국정원 요원 3명(시한부 기소중지 포함) 등 국정원 직원 4명이 꾸민 희대의 날조극으로 마무리됐다. 남재준 국정원장을 비롯해 2차장, 대공수사국장 등은 모두 무혐의 처분받았다. 의혹 초기 ‘증거위조가 없었다.’며 첩보전의 위험성, 간첩 수사의 필요성을 항변하던 수뇌부는 사법처리 땐 부하들을 방패막이로 삼은 채 뒤로 숨어버렸다.
사건 초기 국정원은 간첩 한 명을 잡기 위해 몇 년간 공들이고, 생명을 건 해외 첩보전도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수사결과를 보면, 공들여 증거를 확보하는 대신 돈을 주고 만들었고, 해외 첩보전 대신 우리 외교부와 사법기관을 상대로 공작을 벌였다. 간첩 혐의로 기소된 유우성 씨의 출입국기록을 위조하더니, 이에 대한 발급 확인서와 설명서를 연이어 조작했다. 위조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위조를 자행했고, 적법절차원칙과 증거재판주의는 깡그리 무시했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억울하다고 한다. 기망의 주체가 아니라 기망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기망의 주체는 이른바 정보원, 즉 ‘휴민트’라고 변명하고 있다. ‘조작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휴민트를 팔아넘기고 휴민트에 속은 ‘무능한 국정원’을 선택한 것이다.

피노키오 국정원, 제페토 검찰… 거짓말 연속극

증거조작 파문 이후 국정원은 ‘조작 사실 없다’(2월 14일) → ‘(도장 위조가 드러난 이후)중국에선 관인 여러 개 쓴다’(2월 28일) → ‘(협조자 폭로 이후)협조자에게 속았다’(3월 9일) → ‘남재준 원장의 대국민 사과성명’(4월 15일)으로 이어지는 거짓말 연속극을 보여줬다.
지금껏 대공수사에서 검찰은 국정원에 맹목적으로 의존했다. 그들이 가져다준 정보와 증거를 검증하지 않았고, 덕분에 국정원은 마음 놓고 형사사법체계를 오염시켰다. 피노키오를 만든 건 제페토였고, 거짓말쟁이 국정원을 만든 건 검찰이다.
헌법에 명시된 검찰의 기소독점권은 검찰의 ‘무한 권력’을 뜻하는 게 아니라 기소와 재판 과정에서 검찰에게 ‘무한 책임’을 지운 것인데 검찰은 이런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 뒤늦게 국정원을 상대로 수사했지만, 이미 법 위에 있는 ‘공룡’ 국정원을 건드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니면 건드리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지난해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수사가 검찰에 남긴 트라우마 때문인지, 아직은 공룡이 필요하다는 현실론적 이유 때문인지, 검찰과 국정원 두 기관 모두 살기 위해서인지.

검찰에 ‘부끄러움’을 기대하지 말자

45간첩사건 수사검사들은 증거조작을 몰랐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증거가 비공식적으로 입수된 사실을 숨겼고, 공식적으로 입수됐다는 허위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허위 공문서를 작성·행사한 것이다. 재판부와 피고인을 기망해 진실의 발견이라는 재판의 목적까지 방해했다. 증거를 직접 조작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조작을 의심할 수는 있었을 텐데 검사는 한쪽 눈을 감았다. 그런 검사에게 검찰은 입증 부족을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같은 이유로 국정원 수뇌부도 무혐의 처분했다. 검찰에게 ‘입증 부족’은 ‘의지 부족’을 세련되게 표현한 법적 용어일 뿐이었고, 불고불리不告不理 때문에 법원은 수사검사와 국정원 수뇌부의 행위에 대해 판단조차 할 수 없게 됐다.
검찰은 유우성 씨의 항소심에서 사기죄를 추가했다. 검찰 스스로 사건의 본질은 ‘간첩’ 사건이라고 해놓고선, 간첩혐의의 무죄가 확실해지자 사기죄라도 추가하겠다는 심보였다. 탈탈 털어서 죄를 묻겠다는 건데, 이런 수사 의지를 왜 증거조작 사건에선 보여주지 않았을까. 누가 봐도 부끄러울 일이지만, ‘눈이 하나뿐인 거인’ 검찰에겐 부끄러움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는 막강한 힘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에게 하나뿐인 눈을 찔렸고 신화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공룡은 멸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