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자상 심사위원회 대련 워크숍 후기


방송기자연합회(회장 박흥로) 한국방송학회(회장 김현주) 주최 ‘이달의 방송기자상’의 심사를 맡은 ‘이달의 방송기자상 심사위원회(이하 심사위원회)’는 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중국 대련에서 워크숍을 가졌습니다. 심사위원장이신 김현주 한국방송학회장님이 보내오신 후기를 게재합니다.

 2010. 7. 16 – 2019. 7. 18



단동-대련 워크숍 (with 방송기자연합회 이달의 방송기자상 심사위원단)




인천 – 대련 경유 단동(1박) – 대련(1박) – 인천




1일차. 2010. 7. 16 (금)


– 중국남방항공 CZ686 편으로 인천 출발 12:15 – 대련 도착 12:30(-1)


대련공항은 시내에서 매우 가까이 있다. 현지 가이드를 만나 간단한 점심식사 후 단동행


– 오후 2시경 대련-단동간 고속도로(丹大고속) 진입, 단동은 대련에서 300km… 대련 시내는 항구도시 답게 대형트럭들이 분주히 오간다.


– 단동까지 가는 고속도로에는 차량이 거의 없다. 남쪽 도로와는 완전히 사정이 다르다. 그러나 중국은 이곳 변방 중의 변방에도 훌륭한 도로 인프라를 구축해 놓았다. 언젠가는 이 길도 자동차로 메워지겠지…


– 고속도로 연변은 미국 Midwest와 흡사하다. 후덥찌근한 여름 날씨와 드넓은 평야에 높게 자라는 옥수수까지.. 멀리 가까이 있는 낮은 산들을 제외하면 지평선이 보이는 대평원이다.


– 대련에서 단동 방향 2/3 지점에 대고산(大孤山) 휴게소에서 잠시 쉬니 곧 고속도로가 끝나고 단동의 서쪽 외곽이다. 그동안 북경, 상해, 광주 등 대도시를 다니다가 오랜만에 변방의 지방도시 모습을 보니 새롭다.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우마차와 보행자가 마구 뒤섞인 모습은 7년전 연길에서 봤던 바로 그 모습이다. 중국인들은 이것을 ‘무질서의 질서’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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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동은 인구 50만이다. 외곽 단동 관할지역까지 포함하면 270만이 거주한다. 단동은 중국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잡은 항구이자 중국에서 가장 큰 국경도시이다. 북쪽으로 장백산맥이 시작하는 단동은 중국 국가지정 풍치지구여서 많은 관광객이 유입되는 도시이다. 마침 날씨는 흐렸으나 쾌적하다. 연중 기후가 온화한 곳이다.


– 허름한 도시 외곽을 가로질러 도시 중심지역으로 진입한다. 도시 중심에는 금강(錦江)공원과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탑이 있고 단동역 앞에는 거대한 모택동 동상이 서있다.


– 가일양광(假日陽光) 호텔은 시설이 매우 훌륭하다. 변방의 호텔이라고 믿을 수 없는 초현대식 시설이다. 게다가 나에게 배정된 방은 침실 두 개, 화장실 두 개 짜리 Royal Suite 아닌가? 중국 변방에서 오랜만에 호사를 누리다.


–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역식사 장소인 압록강변 북한식당 평양옥류관으로 향한다. 압록강변의 철교와 단교(斷橋)를 보고 건너편 신의주를 조망하니 묘한 감회가 교차한다.


– 건너편 신의주는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 바다를 만나는 지점의 압록강은 탁하기만 하다. 가이드말로는 몇해 전 까지만 해도 압록강 이쪽 단동이나 저쪽 신의주는 비슷했다고 한다. 그러나 단동이 국경경제협력지역(Border Economic Cooperation Zone)으로 지정되어 개발에 개발을 거듭한 후에는 이제 현격히 양안 격차가 벌어지고 말았다.


– 북한 여성들이 serving하는 식당에서 식사와 회의를 하다. 음식맛은 그저 그렇다. 식사후 나오는 평양냉면도 담백할 뿐 맛은 별로다. 저녁식사가 끝나니 북한 여성종업원들이 대여섯 곡의 노래를 불러 흥을 돋와준다.


– 식당에서 나오니 밖은 이미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간혹 비추는 방공 서치라이트만이 그곳의 존재를 알려 준다. 단동의 거리는 갖은 색의 네온 사인이 화려함을 뽐내지만 건너편 신의주는 완전히 적막에 잠겨 있다. 다행이 중국측에서 압록강 철교 조명을 북한쪽까지 밝혀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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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너편 신의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국경의 밤은 가슴 시리도록 서글프다. 이렇게 참혹한 국경이 또 있을까? 허전한 마음을 안고 호텔로 돌아왔다.


– 호텔방에는 광동성부터 티베트 서장자치구까지 중국 전역의 TV방송이 모두 들어온다. 한국의 KBS뉴스는 홍수 소식을 알린다. 북한 바로 옆에 와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다.


– 호텔창 너머로는 단동역을 오가는 열차가 가끔 지나간다. 가이드말에 의하면 단동은 예전에 탈북자가 많았으나 중국 정부의 강력한 단속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조중국경이야 길지만 그중에서 탈북자가 택할 수 있는 루트는 단동, 길림성 삼합 지역 등 몇 군데에 불과하다고 한다. 탈북후 은신하고 보호할 조선족이 있는 곳이라야 성공적으로 제3국을 통하여 남한 정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저녁식사 장소에서 했던 <이달의 방송기자상> 심사에 이어 호텔방에서 <이달의 방송기자상> 개선안 회의를 하다. 방이 넓어서 7명이 편안하게 맥주를 마시며 회의를 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2일차. 2010. 7. 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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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정필모 심사위원과 함께한 김현주 심사위원장

– 호텔 조식후 다시 압록강변으로 향하다. 원래 압록강 철교는 1911년 일본이 건설했으나 한국전 당시 미군의 공습으로 중국측 4개의 아치만 남기고 모두 파괴되어 지금은 단교(斷橋)로서 중국의 항미원조 전쟁의 유적지로 남은 비운의 다리이다. 중국은 압록강 단교를 애국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항미원조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국가 건설 1년만에 국운을 걸고 수십만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며 도왔던 이웃 북한의 오늘날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중국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중국에게도 회한은 클 것이다. 남한을 도왔던 참전국들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을 뿌듯하게 보고 있지 않은가?


– ‘항미’라는 표현이 섬뜩하게 느껴진다. 중국과 미국은 숙적임을 느끼게 한다. 두 나라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포지션은 무엇일까? 우리 자손들에게 넘겨진 중대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 압록강 단교 바로 옆에는 1958년 건설한 항미원조기념관이 있어 중국의 애국교육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신 새로 건설한 압록강 철교가 온전한 모습으로 중국과 북한을 잇고 있다. 중국은 압록강 철교를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라고 부른다. 마침 압록강 철교위로 달랑 4량짜리 단동-신의주 국경열차가 지나간다.


– 압록강 선착장에서 유람선에 승선한다. 유람선을 철교 밑을 지나 북쪽으로 위화도까지 올라갔다가 회항하여 남쪽으로 압록강 어귀까지 내려간다. 위화도는 여의도 비슷한 크기의 섬이다. 강 兩岸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국경을 놓고 양쪽이 이렇게 대비되는 곳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가보지는 않았지만 가자지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국경, 미국-멕시코 국경이 이만큼 참혹할까? 슬프디 슬픈 국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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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쪽은 움직이는 것이 없다. 높은 굴뚝 두 개를 가진 제지공장이 그나마 신의주 쪽에서는 큰 산업이라고 한다. 북한쪽 조선소에는 낡은 트럭 한두 대가 간혹 움직이다. 남쪽 강가에는 새로 접안시설을 짓느라 낡은 기중기 두 대가 움직이다. 구호가 보인다.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동지 만세” “위대한 수령 김일성…” 등


– 유람선 갑판에서 북한쪽을 주시하는 관광객 중 절반은 한국인으로 보인다. 대학생 쯤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 또한 모두 넋을 잃고 말을 잊었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다. 망연자실 신의주만 바라본다. 그러는 사이 국경경제협력지역으로 지정되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중국 단동의 초현대식 고층건물들이 위용을 뽐낸다.


– 선착장을 벗어난 버스는 압록강 제방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다. 오른 쪽에 위화도가 보이더니 크고 작은 섬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어떤 것은 중국 땅이고 어떤 것은 북한 땅이다. 얕은 개울만 건너면 북한인 곳도 많다. 전기도 안들어 오는 위화도에는 짓다만 별장 가옥들이 버려져 있다.


– 그러는 사이 버스는 호산장성(虎山長城)에 도착했다. 중국은 이곳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 출발점이라고 주장한다. 새로 쌓은 성벽 구조물과 성루가 이곳이 역사날조, 역사왜곡의 현장임을 증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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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산장성에서 몇 발짝 움직이니 가장 근접한 중조변경(中朝邊境) 일보과(一步跨)이다. 작은 개울 건너 한 발짝 건너면 북한 땅이다. 철조망 너머에 북한 경비병이 어슬렁거리고 그 너머에는 북한 마을이 있다.


– 관광객들로 붐비는 이쪽과는 달리 건너편은 인기척이 없다. 여기가 지구의 끝이 아닌가 싶다. 나는 지금 변방 중의 변방에 서있는 것이다. 서글픔이 또한번 몰아친다.



– 단동시내에서 한국식으로 점심식사 후 대련으로 향했다. 약 4시간 걸려 오후 5시 대련시내 성해광장(星海廣場)에 도착했다. 선선한 날씨의 대련은 완벽한 피서지이다. 마침 휴일을 맞아 시원한 해변에 나온 인파로 북적이다. 얼굴이 희고 다리가 곧고 긴, 늘씬한 북방 미인들이 눈에 많이 띤다. 우람한 체격의 남성들도 자주 보인다.


– 멀리 내다 보이는 발해만, 광장을 둘러싼 높고 낮은 산, 높은 건물과 신축 아파트, 구불구불한 언덕길, 러시아풍 혹은 일본풍 건축물, 박공 지붕의 건물 등 대련은 부산, 샌프란시스코, 홍콩을 아주 조금씩 닮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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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해광장을 나와서 바닷가 산악도로를 끼고 도니 노호탄 광장, 이어서 시내로 이어진다. 해안도로에는 근사한 별장 주택과 고급 주택들이 즐비하다.


– 시내 중심에서 해산물과 청도맥주, 장성(長城)포도주로 포식하고 중산광장(中山廣場)과 민주광장 사이 천진가(天津街)에 위치한 Holiday Inn Express 호텔에 여장을 풀다. 대련의 간단치 않은 역사답게 러시아인과 일본인 관광객들이 눈에 많이 띤다.


– 호텔에서 나와 대련의 밤거리를 걷기 시작해다. 호텔에서 5분 거리에 대련항을 가까이 두고 러시아 거리가 있다. 러시아식 건물이 늘어선 거리는 이제 기념품 상점으로 남아 있다.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작은 분수광장과 낡은 호텔이 러시아 거리의 중심이다. 거리 뒤편으로는 한 세기전 러시아인들이 거주했던 러시아식 가옥들이 이제는 낡은 채로 버려져 빈민가로 전락해 있다. 그나마 도시 재개발로 헐리면 이제 러시아의 흔적은 상징적 건물 몇 개를 제외하면 모두 사라질 것이다.


– 지금은 형편없이 쇠락했지만 한때 러시아 극동함대 주둔지역이었던 여순대련 아닌가? 그러나 어디에서도 노제국의 옛 영광을 찾아볼 수 없다. 삼국간섭(1895) 이후 10년 가까이 조차해 왔던 여순대련을 러일전쟁 패배로 일본에 내주고 짐을 싸야 했던 대국의 기분은 어땠을까? 대련의 거리를 걸을수록 당시 비장했던 러시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 러시아 거리를 나와 10분 남짓 걸으니 대련역이 자리잡은 승리광장이다. 러시아가 도시를 설계한 대련에는 성해광장, 중산광장, 우의광장, 승리광장 등 광장이 많다.


– 대련역에서는 가깝게는 여순과 단동, 멀리는 상해, 가목사, 치치하얼, 만주리, 하얼빈, 연길, 도문 등 열차가 드나든다. 옆에는 산동반도 연태와 위해로 가는 여객선이 하루 여러 차례 입출항한다.


– 대련역전 승리광장은 온갖 시내버스가 모이는 정류장이 있다. 승리광장을 벗어나 다시 10분 남짓 걸으니 중산광장이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먹자골목과 노점상골목이다.




(3국 간섭)
청일전쟁(1894-1895)의 결과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이 청나라에서 할양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이 개입하여 청나라에 되돌려 준 사건. 당시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맹국이었고, 러시아의 관심을 아시아에 묶어 두려는 독일의 의도가 합치하여 이루어짐. 3국간섭으로 일본은 여순대련에서 후퇴했으나 3국은 청나라로부터 새로운 이권을 얻었으며 러시아는 1908년 여순대련을 강제조차하여 여순항에 극동함대를 주둔시켰고, 조선에서는 친러세력이 힘을 얻음. 그러나 복수를 결심한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에 승리하여 1905년부터 1945년 8월 24일까지 여순대련을 경영함. 이후 러시아는 1945년 8월 24일 패망한 일본을 몰아내는 해방군으로 여순대련에 다시 입성하여 1955년까지 주둔함. 결국 여순대련은 일본과 러시아가 각각 두 번 씩 들어왔던 곳이다.

(러일전쟁)
여순대련은 러일전쟁에서 가장 참혹한 육전(陸戰)이 벌어졌던 곳임. 1년 가까이 진행된 전쟁에서 일본은 6만명, 러시아는 3만명의 전사자를 냈지만 일본이 이긴 전쟁. 제물포 앞바다 해전에서는 일본이 러시아 극동함대를, 대한해협 해전에서는 90일동안 지구를 돌아 지친 발틱함대를 일본이 격침하면서 일본이 승리한 전쟁




3일차. 2010. 7. 18 (일)


– 호텔을 나오니 곧 중산광장이다. 일본식 건축물이 광장을 에워싼다. 중산광장을 돌아 어어지는 중산로를 남행하니 일본식, 러시아식의 웅장하고 기품있는 건물들이 번갈아 등장한다. 아직도 공공건물로 멀쩡히 잘 활용되고 있다.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가 대련에 공을 들인 화려한 흔적이다. 간단치 않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자취가 대련에 고스란히 집적되어 있는 느낌이다.


– 계속 버스를 달려 대련 시내에서 40km 떨어진 여순구(旅順口)에 도착했다. 진해를 닮은 고즈녁한 도시이지만 열강이 각축했던 치열한 현장이다. 지금은 중국 해군 함대가 사용하고 있지만 여순항은 러시아-일본으로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1910. 3. 26) 여순감옥을 방문했다. 약 8천평 부지를 가진 거대한 감옥이다. 한국 뿐 아니라 수많은 중국의 항일 애국지사들이 순국한 곳이기도 한 여순감옥은 중국의 애국교육현장이기도 하다.


– 감옥 한 구석에는 교수형장이 있다. 시신들을 나무 바구니에 넣어 아무렇게나 내버린 뒷 동산에는 얄궂게도 신축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안중근 의사도 흔적없이 그곳 어딘가에 묻혀있을 것이다.


– 여순감옥에서 10분 미만 이동하니 관동지방법원이 나온다. 여순일본관동법원 혹은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건물이다. 건물이 낡아서 대련시 정부가 철거하려 했으나 한국의 안중근 기념사업회가 지켜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언도를 받은 법정이 복원되어 있다. 당시 안중근 재판은 세계 언론이 주목했다. 당시 중국에 들어와 있던 영국(홍콩 경영), 독일(청도 경영), 프랑스(상해 조차) 등은 안중근 의거가 자신과 밀접할 수 있는 사건으로 보고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 여순법원 한 켠에는 일본이 사용했던 고문도구가 전시되어 있다. 서울 서대문역사공원에서 봤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혹한 도구들이다. 일본이 중국에서는 말할 수 없이 잔혹했음을 말해 준다.


– 이어서 러일전쟁 격전지 203고지를 방문했다. 203고지에서만 1년동안 일본군 1만명, 러시아군 5천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안내판은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 한국어로 표기되어 있을 만큼 동아시아 근현대 여러 나라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얽힌 곳이다. 마침 일본인 관광객들이 눈에 많이 띤다. 100년전에 사용한 8km 사정거리를 가진 일본의 258mm 대포가 보존되어 있다.


– 대련 시내로 나와 점심식사 후 공항에 나가 중국남방항공 인천행 CZ675편을 기다린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어서 당초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으나 대련단동 여행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볼 거리,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다. 동북아시아 근현대사의 거대한 흐름의 한 복판에 대련이 있었다. 영웅호걸과 수많은 시민들, 군인들의 운명이 이곳에서 바뀌었을 것이다.



글 / 이달의 방송기자상 심사위원장
김현주 한국방송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