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자, 전투기를 타다


KF-16 전투기 동승 취재기
방송기자, 전투기를 타다


SBS 뉴스텍 정상보 기자


 


 


이번엔 누가 타실 겁니까?”


지난 연말 어느 늦은 오후, 국방부 카메라기자실에 공군 관계자가 찾아왔다. “아시죠? 해마다 전투기 신년 초계 비행에 카메라기자 한 분씩 동승 취재하는 거, 이번에는 연평도 도발도 있고 해서 서해 5도 쪽으로 비행을 할까 하는데순간 정적이 흘렀다. 서로 말끄러미 쳐다볼 뿐 말이 없다. “그럼 일단 출입기자 분들은 전부 항공생리훈련을 받으시죠, 어차피 그 훈련을 통과해야만 전투기를 탑승할 수 있으니까


두려웠다.


전투기라는 것이 사고도 좀 잦은 거 같고, 에어쇼에서 본 바로는 롤러코스트의 10배쯤은 어지러울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남북관계가 이렇게 팽팽하게 긴장된 상황에서 서해 5도를 비행한다는 것이솔직히 영 내키지 않았다. 1년 동안 힘들고 어려운 취재를 함께 해온 국방부 출입기자 동료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나 보다. 내가 그랬듯그들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훈련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수평 감각을 상실해 수많은 사고의 원인으로 지적되는 비행착각을 경험하기도 했고, 산소가 부족한 8000미터 상공의 저산소 환경에서 산소마스크를 벗고 의식을 유지하는 훈련을 받기도 했다. 특히 체중의 6배 압력이 가해지는 속에서 30초를 견뎌야 하는 가속도 훈련을 받으면서는 거의 의식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


점점 실제로 전투기를 탑승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비록 훈련이지만 전투기 조종석에 앉아 헬멧을 쓰고 조종간을 손에 잡자 어렴풋이 어린 시절 가슴을 요동치게 했던 영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바로 <탑건>(Top Gun/1986)이었다. 빡빡머리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몇 번이나 넋 놓고 봤던 영화 <탑건>!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조종석에 앉아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미소 짓는 톰크루즈의 모습을 보면서 파일럿의 꿈을 꿔보지 않았던 남자가 있었을까?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로망이 생각나면서 전투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다는 열망이 점점 강렬해졌다. 훈련이 끝난 후 국방부에 돌아와서 출입기자 동료들에게 내가 타겠다고 했다.


훈련에 통과한 동료들도 그 전과는 달리 한번 타보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다행히 한발 빨리 선수를 쳐 그냥 내가 타는 것으로 결정되어 버렸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러시아에서는 일반인에게 전투기 탑승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비용이 무려 600만원 정도 한다고 한다. 어린 시절 꿈도 이루고 값비싼 체험도 무료로 하게 된 그야말로 잡은 격이 된 것이다.




비행 예정일 하루 전 날,


청주에 있는 공군 비행단에 도착했다. 비행 코스를 확인하고, 함께 탑승하게 되는 조종사와 인사를 나눈 후 전투복과 헬멧, 산소마스크 등을 체형에 맞게 피팅하는 등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밤 늦게, 공군 관계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새벽에 날씨가 좋지 않아 일출 촬영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청천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신년 초계비행에 일출이 없다는 것은, 단팥빵에 팥이 없다거나 카페라떼에 우유가 없는 것처럼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11일 첫 번째 아이템, 첫 컷에 일출이 없다는 것! 그건 우리 방송기자라면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우리 회사 뿐 아니라 대한민국 방송사 풀로 전투기를 타는 상황에서 하늘이 내게 일출 물을 먹이다니창문을 열고 깜깜한 하늘을 보며 그렇게 멍하니 밤을 지새웠다. 새벽 330, 퀭한 몰골로 전투기를 타기로 되어있는 부대로 향했다. 부대 정문 앞에 도착해 착잡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저 멀리서 어제 만났던 공보장교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미쳤나웃기는이런 상황에


정 기자님, 갑자기 날씨가 점점 좋아지고 있답니다. 운무도 없고, 바람도 없답니다. 1년에 몇 번 없는 정말 비행하기 좋은 날이랍니다. 일출도 아주 깨끗하게 보일 거 같다는데요!”
살았다! 그때서야 공보장교와 두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며 어린애처럼 웃을 수 있었다.


새벽 5, KF-16 전투기에 탑승했다.


전투기를 탄다는 것은 여객기나 헬리콥터를 타는 것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굉음을 내며 이륙하는 속도도 굉장했고 이륙 후에 갑작스럽게 방향 전환을 할 때는 소름이 돋기도 하였다. 순식간에 360도 회전을 하거나 빠른 속도로 옆으로 비행하기도 했고, 심지어 하늘을 발 아래 두고 거꾸로 날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고도를 높이거나 낮출 때는 몸에 강한 압력이 느껴져 훈련 때 배웠던 특수 호흡을 해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상쾌했다.


날씨 때문에 걱정했던 마음이 한번에 홀가분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전후, 좌우, 심지어 위쪽까지, 아래쪽을 제외한 모든 공간의 시야가 탁 트인 전투기에서의 호흡은 정말로 신선하고 깨끗했다. ! 한 마리 새가 된 거 같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 였구나동해 일출, 눈 덮인 대관령, 대청봉 정상을 지나 멀리 금강산이 보이는 동부전선, 휴전선을 옆에 두고 단번에 중부전선을 거쳐 서해 5도까지. 60년 전 아픈 전쟁의 상흔을 간직하고, 천안함 사건, 연평도 도발 등의 긴장 상황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한반도지만 하늘에서 둘러 본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비행단에서 만난 공군 조종사들이 하나같이 한반도의 하늘을 반드시 수호하겠다는 강한 애국심을 보인 것이 어쩌면 그들이 본 한반도가 이렇게 아름답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신년 초계비행 취재가 모두 끝났다.


그리고 나는, 전투기를 타기 전과의 나와는 다르게 이제 전투기 타 본 사람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방송기자여서 그 전의 나와 달라진 것이 참 많다. 더운 날엔 가장 더운 장소를 찾아 가기도 했고 춥거나 바람 불거나 비가 올 때도 가장 강렬한 현장을 찾아 다녔다. 외국에도 많이 나가보고, 별의별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장갑차, 뗏목, 잠수함, 초계함, 항공모함, 기구, 패러글라이딩, 헬리콥터에 전투기까지탈 것도 참 많이 타봤다. 그렇게 방송기자라는 직업은 내게 많은 경험을 허락했다. 누군가 그랬다. “사는 건 경험하는 것이라고.


그런 맥락에서 보면 다른 직업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방송기자들은 어쩌면 경험 그 자체로도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탑건>을 보고 파일럿을 동경했던 수많은 남자들 중에서 실제로 전투기를 타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방송기자여서 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방송기자여서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