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대한 경계를 배우는 곳 국회_OBS 유한울 기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번 휴가 기간 중에는 후흑론(厚黑論)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려고 합니다.”


8월 초 한나라당이 1차 당직 인선을 마친 다음날이었습니다. 갑자기 기자회견을 요청한 홍준표 최고위원이 대뜸 ‘후흑론’을 언급했습니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단어를 한 글자씩 떼내어 내뱉는 그의 눈에는 노여움이 가득했습니다. 원래 약속과는 달리 이번 인선에 자신의 뜻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데서 오는 감정이라는 것은 출입기자라면 누구든 짐작 가능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얼굴은 두껍고 마음은 까맣게’ 하겠다는 홍 최고위원의 말은 한층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수차례 브리핑은 기본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이메일, ‘카더라’ 통신은 왜이리 많은지…
그렇습니다. 수많은 말이 기포처럼 떠올랐다가도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마냥 사그라지는 이곳, 바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 국회입니다. 거의 매일 아침마다 열리는 각 정당의 회의를 시작으로 수 차례의 브리핑은 기본입니다. 특정 쟁점이 급부상이라도 하는 날에는 여야 대변인을 보는 횟수는 훨씬 더 많아집니다. 여러 정당과 의원실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이메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왜 그리 ‘카더라’ 통신이 많은지 모릅니다. 당 관계자가 자기 진영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사가 나가도록 아예 기자를 붙잡고 설득하는 일도 즐비합니다.


이러한 말의 홍수 속에서 기자, 특히 저 같은 ‘말진’이 살아남는 길은 무엇일까요? 우선 빠른 타자치기는 기본 덕목입니다. 회의에서 의원들의 발언을 가급적 그대로 옮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터져 나오는 ‘애드립’까지 챙기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또 ‘아는 만큼 들린다’는 토익(TOEIC) 시험 듣기 영역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정치권이 온갖 현안을 총망라하는 곳이다 보니 그네들의 말을 제대로 듣고 받아 치기 위해서는 각종 사회 현상에 대한 숙지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덕목은 말에 대한 경계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는 언론인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자세입니다. 하지만 정치부에 적을 두고 있는 기자라면 그 방어벽이 갑절로 두터워야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듣는 이야기들은 현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은 혹하기 쉬운 수사에 자신의 신념과 이해관계를 녹여냅니다.



이러한 까닭에 국회에서의 매 순간은 시험대에 올라가 있는 기분입니다. 수많은 말 중 ‘과연 무엇이 사실인가’는 물론이거니와 ‘왜 내게 이 이야기를 하는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아도 일단 고민부터 시작하고 볼 일입니다. 따라서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상대방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는 순간에도 머릿속에는 오만 가지 생각이 오고 갑니다.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불쌍하다며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취재가 한 인간을 알아가는 행위라는 점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니까요. 정치인도 인간인지라 한 걸음 다가가면 처음에는 ‘사람’이 보이고 또 다른 걸음을 옮기면 그가 한 ‘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느끼는 재미는 생각보다 쏠쏠합니다. 성취감이 큰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고요. 이렇게 하루하루를 즐기다 보면 말의 폭풍우에 휘말리지 않고 굳건히 서 있는 방법도 터득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될 날을 꿈꾸며 지금까지 국회에서 OBS뉴스 유한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