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兄에게_KBS 정수영 기자


현석이 형, 날이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추위로 치면 어디에 견줘도 지지 않는다는 고장 춘천에서 맞는 초겨울 아침 공기는 어떤가요? 올해도 어느덧 12월입니다. 현석이 형이 이곳 여의도 보도본부를 떠나 강원도 땅 춘천 총국 생활을 시작한 지도 일 년을 채워 갑니다.


돌이켜보면 형이 춘천으로 떠나게 되리라는 이야기는 풍문으로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윗선에서 결정한 일이라는 말이 오갔습니다. 보도본부 한 간부가 형을 불러다 지역 근무할 뜻이 없느냐는 말을 건네면서 비로소 사람들은 똑똑히 알아챘습니다. 현석이 형을 춘천으로 발령 낸 보복 인사는 지난해 마지막 날, 12월 31일 났습니다. 현석이 형을 기어이 한 번 더 손을 봐 줘야겠다고 집요하게 들쑤신 자가 콕 집어 누구인지는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권력을 편들고 강자에 빌붙어 한 몫 챙기려는 못난 자들이 알아서 희생 제물을 바친 것인지도 모르지요. 이런 수작이었을 겁니다. ‘우리 하는 일에 맞서면 끝까지 가만 두지 않을 테니 알아서 몸 사려라.’



현석이 형, 형은 저들로써는 참으로 눈엣가시였습니다. KBS를 손아귀에 넣고 입맛대로 부리려는데 겁 없이 반기를 들다니요. 권부를 갓 잡은 서슬 퍼런 정권이 검찰과 감사원, 경찰을 무차별적으로 동원한 작업이 KBS 장악 작전이었습니다. 거기에 맞선 한 줌도 안 되는 무리를 이끌다니 지금 생각해도 형은 참 무모했습니다.



형이 PD협회장과 함께 파면당한 작년 초, 회사 앞 술집에 모인 기자들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습니다. 전면적인 제작 거부 투쟁이 전개되자 기세에 놀란 사측은 파면을 정직으로 황급히 낮추고 한 발 물러섰습니다. 하지만 일 년 뒤 부관참시처럼 자행된 현석이 형 보복 인사는 간신히 마음을 다스리려 애쓰던 이들로 하여금 또 한 번 피가 거꾸로 솟게 만들었습니다.


KBS가 숱한 ‘꺼삐딴 리’들이 활개치는 무참한 무대로 전락하며 생겨난 ‘김현석’은 형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KBS 탐사보도팀을 이끌며 권좌에 오른 자들의 탈선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김용진 선배, 현석이 형만큼이나 정당한 구실 없이 느닷없는 지방 발령을 통보 받은 황상길 선배가 정든 일터를 떠나 오늘도 가족과 떨어져 지내도록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몇몇 이들은 KBS 보도본부를 주무르는 이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떠나갔습니다. 탐사보도팀에서 느닷없이 스포츠국 발령을 받았던 최경영 선배는 미국으로 훌쩍 떠났습니다. 자비를 들여가며 해외 연수 길에 나선 또 다른 선배도 떠오릅니다. 이 모든 일들을 저지른 책임이 있는 이들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현석이 형! 형과 제 2, 제 3의 김현석들을 핍박한 자들이 보인 무도함과 몰상식은 보도본부 양심 있는 기자 동료 선후배들의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묶는 데 실패했습니다. 도리어 거센 역풍만 불러왔습니다. KBS 기자들이 짓밟힌 저널리즘 앞에 분노와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더했을 뿐입니다.



보십시오. 형이 대변인을 맡았던 KBS 사원행동은 사라지고 없지만 뒤이어 일어선 KBS 새 노조가 조합원 천 명을 넘어선 지 오래입니다. 파업에 돌입해 지난 여름 7월 한 달을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어깨를 걸고 싸웠고 마침내 노사 단체협약을 체결해 냈습니다. 이제 더 이상 KBS를 정권홍보 수단으로 마음껏 부려 먹지 못하도록 막아낼 수 있는 틀을 결국에는 싸워 얻어내지 않았습니까? 마구잡이식 정권 편들기, 정권 눈치 보기 방송이 더 이상 국민의 방송 KBS에 발붙일 수 없도록 지켜낼 큰 무기를 손에 넣었습니다.



시청자에게 마땅히 알려야 할 내용일지라도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으레 방송을 낼 수 없겠거니 하는 무거운 공기를 깨는 소중한 저널리즘 성과들도 속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 조사 과정에서 국방부가 드러낸 허점을 파고든 추적 60분 방송, 광풍이라 할 만한 정부의 G20 정상회의 홍보 과정에서 드러난 언론 보도 문제점을 지적한 미디어비평 방송이 전파를 탔습니다. 정권 입맛에 충실한 ‘윗선’은 언제나처럼 집요하게 물타기 요구에다 불방까지 시도했지만 저널리즘에 투철한 젊은기자, PD들은 결국 이겨냈습니다.



물론 아직 KBS 보도본부는 춥고 어두운 얼어붙은 툰드라나 다름없습니다. 부끄러운 지시에 신물이 난 많은 젊은 기자들이 일할 의욕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언제고 방송을 정권에 부화뇌동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을 것임을 선후배 동료 기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정권이 KBS를 헤집어 놓고 노리개로 삼은 이래 빗발치는 시청자들의 비난과 조롱도 여전합니다.



먼 길이 될 것입니다. KBS를 오로지 국민만을 두려워하는 방송으로 되돌려놓는 날, 정권과 자본을 움켜쥔 자들이 농락할 수 없는 청정지대로 바로세우는 날, 그래서 국민들이 진정 KBS 뉴스와 프로그램을 무한히 신뢰하고 KBS는 지켜줄 만한 가치가 있는 언론사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날을 맞이하는 길 말입니다. 형을 비롯해 KBS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모든 기자들은 기어이 그 길로 나아갈 겁니다.


형이 다시 가족과 정든 벗들 곁에서 지내게 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털웃음 지으며 돌아오십시오. 모두가 형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날까지 건강하고 마음 편히 지내시길 빕니다.



2010년 12월 6일
여의도에서 정수영 드림


KBS 김현석 기자는…

前 KBS 기자협회장, ‘공영방송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 대변인이었던 김현석 기자는 지난 연말 춘천으로 징계성 발령을 받았습니다.


KBS기자협회는 지난 2월 사측으로부터 6개월 이후 김현석 기자를 재발령하겠다는 말을 믿고 제작거부 결의를 철회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