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한국방송기자대상 기획보도 부문_해방70년 특별기획-친일과 망각_뉴스타파 박중석, 심인보, 송원근, 최윤원, 최형석, 김남범 기자

제대로 기록하고기억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1년에 발표한 건국 강령 제3장 ‘건국’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적의 일체 통치기구를 국내에서 완전히 박멸하고… 적에 부화한 자와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건국강령을 반대한 자와 정신이 결함된 자와 범죄판결을 받은 자는 선거와 피선거권이 없음. 부적자(附敵者: 적에 아부한 자)의 일체 소유자본과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그러나 그로부터 7년 뒤인 1948년 말,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에서는 전 수도경찰청 총감 노덕술과 일단의 친일 경찰들이 반민특위 요인 암살 계획을 세운다. 실제 살인청부업자에게 자금과 권총, 수류탄까지 지급했다. 이 계획이 미수로 돌아가자 이듬해인 1949년 6월 6일, 친일 경찰들은 마침내 반민 특위 습격을 감행한다. 그리고 20일 뒤인 6월 26일에는 친일파 처단을 역설하던 김구 선생이 암살됐다.

만약 반민특위가 성공했더라면,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건국 강령이 현실화되고 친일파들이 청산됐더라면 친일에 대한 기억은 역사 교과서 속에만 남아있을 것이다. 만약 친일파들이 제대로 죗값을 치렀더라면 그 후손들 역시 우리 사회 구성원의 한 명으로서 별다른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친일파들은 반공과 건국, 산업화를 핑계로 끈질기게 살아남아 해방된 한국의 주류를 차지했다. 그들의 후손들 역시 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자산을 물려받아 한국 사회 곳곳에서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았다.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의 집단적 기억에서 친일 문제는 강요된 망각의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정반대의 위치로 전도시켰다. 노무현 정부 당시 발족한 친일반민족 진상규명위원회가 1,006명의 친일파를 ‘국가 공인’하는 성과를 냈으나 거기까지였다. 상당수의 친일 후손들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고, 친일 문제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

해방 70년을 맞아 뉴스타파가 시도한 작업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뉴스타파는 반민특위의 실패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어렵게 명맥을 이어온 친일 청산 작업의 한 귀퉁이에 서는 역사적 책무를 감당하고자 했다. 감히 반민특위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8개월 동안의 취재를 통해 국가가 공인한 친일파 1,006명의 후손 가운데 1,177명을 찾아냈다. 반민특위 조서에서 발견한 힌트를 단서 삼아 오래된 문서들을 뒤지고, 친일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 자료들과 과거 신문의 부고 기사들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가계도를 그려나갔다. 친일 후손들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현 시점에서 친일 청산과 관련해 내디딜 수 있는 조그만 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마 자신의 뿌리에 대한 고민 없이 살아오다가 뉴스타파의 연락을 받은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연좌제가 폐지된 마당에 할아버지, 때로는 증조할아버지의 잘못을 가지고 연락을 하다니…. “선생님의 증조부께서 친일파 명단 1,006명에 포함돼 있는 것은 알고 계시죠?” 라고 말을 꺼내면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라는 식의 반응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친일한 것 아니지 않습니까?”라든가 “지금에 와서 이걸 들쑤셔서 어쩌자는 겁니까?”라는 반응도 있었다.

그렇다. 이미 친일파들의 후손들은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주류로 뿌리내렸다. 이제 와서 이들을 처벌하거나 추방할 수는 없다. 이들 역시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합쳐야 할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이들과 함께할 수 있을까? 우리는 친일 후손들로부터 그 조상들이 하지 못했던 진지한 자기반성과 사과를 끌어내고 싶었다. 물론 조상의 사죄에 대한 잘못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뉴스타파는 최대한 정중하고 신중하게 이들에게 이메일과 손편지를 썼고 답장을 기다렸다. 때로는 전화를 걸기도 하고 직접 찾아가기도 했지만, 최대한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를 견지했다. 뉴스타파의 이러한 노력에 마침내 3명의 친일 후손들이 응답했다. 이들은 역사와 민족 앞에 선대의 잘못에 대해 사죄했다. 단 3명이었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민족의 위기 앞에서 자기 헌신과 희생으로 스러져갔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이 정말 옳은 것이었음을, 그 반대편에 섰던 기회주의적 출세주의자들의 후손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회주의자들이 비록 현실에서는 권세와 부를 누렸을지언정 결국은 그 후손들로부터도 인정받을 수 없는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정당성을 확고히 부여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용서든, 역사적 화해든 바로 이러한 작업, 즉 바로 역사적 정당성이 어느 쪽에 있었는가를 확실히 인정하는 것으로부터만 출발할 수 있다.

뉴스타파는 비록 지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친일 후손의 실체와 현재를 드러냈고, 사죄를 끌어냈다. 그러나 방송 이후 벌어진 일련의 ‘역사 쿠데타’ 시도들을 보면 우리의 작업이 대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친일 후손들과 친일 세력의 계승자들은 현실의 힘을 이용해 역사에서도 ‘승자’의 역할을 독점하려 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가 가진 힘은 제대로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뿐이다.

심인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