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회 뉴스부문_‘중, 블랙리스트 북 선박 강제퇴항’_SBS 이상엽 기자

서울에서 던진 구슬, 룽커우에서 받아 꿰었다

SBS 국제부 임상범, 이상엽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긴장된 분위기가 역력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이후 국제연합(UN)이 서슬 퍼런 대북 제재 결의안을 발표하고, 북한 원양해운관리회사(OMM) 소속 선박 31척을 제재 대상으로 공시한 직후였다. 하지만 당장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마침 필리핀 수빅 만에서 첫 번째 신호가 왔다. 북한이 실제 소유주인 ‘진텅호’가 항만에서 필리핀 당국에 압류돼 있다는 속보였다. 시작은 거기서부터였다. UN 안보리 결의안에 등재된 나머지 선박 30척의 소재를 찾는 것. 정승민 국제부장의 아이디어였다.
이상엽 기자가 민간 해사 트래킹 사이트인 ‘마린트래픽(MarineTraffic)’에서 국제해사기구(IMO) 고유번호와 선박명을 이용해 일일이 31척의 소재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추적하는 과정에서 북한 선박들의 수 차례에 걸쳐 선박명을 바꿔 제재를 피하려 한 정황도 드러났고, 중국과 러시아 등 인근 해역에서 항해 중인 상황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상엽 기자는 이 내용을 3월 6일 리포트로 제작해 보도했다.
그러던 가운데 중국 산둥성 북부에 위치한 룽커우(龍口)항에 북한 선박 ‘려명(RyoMyong)’호가 정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배는 3월 4일부터 이 항구 앞바다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정선(停船)하고는 있었지만 입항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이유가 무엇인지 감이 왔다. 임상범 베이징 특파원은 당일로 짐을 꾸려 바로 룽커우항으로 날아갔다.
임 특파원이 룽커우항에 도착할 때쯤엔 다른 언론사들도 제재 대상 선박 31척의 위치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한 방송사에서는 외신에서 언급한 산둥성 르자오항을 찾았다가 허탕을 치기도 했고, 다른 케이블 방송사들도 인터넷으로 검색한 자잘한 속보를 내기 시작했다. 이러는 사이 이상엽 기자는 정확한 려명호의 위치와 상태를 임상범 특파원에게 전달했고, 인근에 다른 북한 선박 6~7척이 함께 머물고 있다는 정보도 입수해 수시로 연락을 취했다.
저녁에 현장에 도착한 임상범 특파원은 곧바로 려명호를 찾아냈다. 문제는 접근할 방법이었다. 항구에서 약 7km 이상 떨어진 해상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현지 어선을 수배했다. 중국인 어부는 우리 돈 60만원이라는 거금을 불렀지만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이상엽 기자가 알려주는 위치에 따라 GPS 위치추적장치 하나만 믿고 밤바다를 한 시간 이상 이리저리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눈앞에 선명하게 붉은 한글 ‘려명호’란 글씨가 나타났다.
임 특파원은 려명호에 타고 있는 북한 선원들에게 접근해 말을 붙였다. 북한 선원들은 ‘날씨가 나빠서’ 입항하지 못하고 앞바다에 머물고 있다고 했지만, 바다는 잔잔하기만 했다. 언제쯤 접안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그들과의 대화 내용은 동승한 SBS 카메라 오경익 기자가 고스란히 기록했다. 이 르포는 곧바로 서울로 전송돼 3월 8일 SBS 8뉴스의 단독 리포트가 됐다. 연합뉴스를 비롯한 국내외 언론이 일제히 이 내용을 받아썼다.
다음 날도 룽커우항은 SBS의 독무대였다. 다시 접촉한 북한 선원들은 ‘들여보내지 않아서 여기 있다’며 중국 측이 입항을 금지시키고 있음을 시인했다. 룽커우항 운영사 측은 화물을 내리지 못하고 통관도 안 된다며 완강히 거부 의사를 밝혔고, 강제 퇴항 조치까지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UN의 대북 제재가 중국에서도 실효를 거두기 시작했다는 너무나 확실하고도 생생한 증거였다.
서울의 이상엽 기자는 부지런히 정보를 실어날랐다. 려명호 뿐 아니라 미림호 등 제재 대상 북한 선박 6척이 중국과 러시아 항구를 떠나 남포항으로 귀환하고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찾아냈다. 북한 선박의 입항 거부가 가시화되자 평양에서 일괄 지령을 내려 선박들을 귀환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움직임이었다. 서해상의 북한 선박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누구보다 잘 보여주는 새 취재기록들은 다음 날인 3월 9일 SBS 8뉴스의 두 번째 단독 리포트로 만들어졌다.
전날보다 더 생생한 싱크와 현장 그림,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모두 담아 멋지게 녹여낸 기사라는 호평이 쏟아졌다. 서울 본사 기자와 현장의 특파원이 긴밀하게 협업하지 않았더라면 만들어낼 수 없는 작품이라는 칭찬도 쏟아졌다.
대북 취재는 대개 취재여건이 열악하다. 정보의 창구도 극히 제한돼 있고, 현장에 접근하지 않는다면 외부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그런 정보도 많다. 이 때문에 대체로 중국이나 일본 등의 외신에 주로 의존해 온 점은 지금까지 대표적으로 꼽혀 온 한국 저널리즘의 병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엔 정확히 그 반대였다. 한국의 언론이 서해바다를 사이에 둔 협업을 통해 누구보다 먼저 대북 제재가 벌어지는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달했고, 외신이 이를 받아 인용했다. 세계 뉴스를 주도하는 한국 언론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데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는 평가와 완벽한 협업의 본보기라는 격려에 힘입어 사내 특종상 금상을 받고서야 이달의 방송기자상에 출품할 만 하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고 임상범, 이상엽 두 기자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