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회 지역보도부문 기획보도상_농부, 씨앗을 잃다_전주MBC 고차원 기자

종자 위기는 곧 농부,농촌의 위기임을 알아야
 
종자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할 때 처음 든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자를 자본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과장된 불안이나 막연한 공포를 조장하며 선정적으로 흐르지 말자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종자를 농촌, 농부와 결부지어서 생각해야 한다는 전제도 붙였습니다. 사람이 없다면, 농촌이 없다면 종자는 더 이상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국내에 세계적 규모의 종자 기업이 없다는 점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고 걱정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식량이나 곡물 자급률입니다. 하지만 정부나 언론 모두 이 문제를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종자산업은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로 종자를 수출해서 외화를 벌어들이자는 이유, 단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몇가지 원칙을 세웠지만 풀어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학계와 농촌 현장의 전문가들을 만나 의견을 듣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종자 문제를 다룬 책들을 섭렵하고 여러 편의 기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고민하기를 몇 개월, 드디어 뭔가 실마리를 잡는 듯 했습니다. 농부와 농촌의 시각에서 종자 문제를 들여다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종자 산업으로 돈을 벌고자하는 쪽의 얘기는 굳이 방송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당사자들이 어련히 알아서 발빠르게 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정리가 되자 나머지 문제는 술술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언론이 말하지 않거나 별것 아닌 것처럼 지나친 문제가 정작 소중한 내용임을 알게 됐습니다.
 
 
재배 작물과 종자 선택권을 빼앗긴 농부
 
현재 농부들은 기업에서 판매하는 종자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고 결과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내 논과 밭에 어떤 종자를 심을지 선택하는 것은 농부보다는 유통업자와 판매업자 쪽입니다. 농부는 마치 축산이나 양계업자처럼 잠시동안 농작물을 맡아주는 아주 단순한 존재로 내몰렸습니다. 농촌을 유지하는 근간인 농사의 처음과 끝이 이렇게 변하면 농촌 역시 크게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종자에 대한 권리가 농부에서 기업으로 옮겨가고 재배 작물과 품종의 결정권이 농부가 아닌 유통과 판매업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결국 농촌을 지금과 전혀다른 공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소비자 역시 먹을 것에 대한 선택 권리가 매우 제한되고 있습니다. 몸에 좋고 안좋고를 떠나 다양한 식감과 맛을 지닌 농산물을 먹을 수 없게 됐습니다. 마트나 백화점에 진열된 화려하고 각양 각색의 농산물은 빛깔이 좋고 보관이나 유통이 쉬운 것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과일은 종류를 불문하고 단맛을 강화한 종자가 퍼지면서 고유의 풍미도 사라졌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별다른 잇점이 없지만 판매와 유통업자는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해외식량기지, 종자보관소에 현혹된 우리 사회
 
한때 우리 정부는 해외식량기지 개척에 열을 올렸고 인류 최후의 종자보관소라는 스발바르 저장소도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식량 위기가 닥친다면 그것은 한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적 재앙과 기후변화 등으로 상당수 국가에서 식량 공급에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해외 식량기지에서 생산한 곡물을 온전하게 한국으로 반입해올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종자보관소는 또 어떻습니까? 인류가 스발바르 저장소에서 종자를 구하게 되는 상황이 도래했다면 그것은 곧 인류 최후의 날을 맞이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미 그 상황에서는 보편적 가치로서의 종자나 식량 개념이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종자 보관소의 존재는 현실에서 의미를 지닐 수 없습니다.
 
종자가 소중하다면 다양한 종자들이 이 땅에서 제대로 길러지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소농들이 자가 채종을 하며 걱정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어야 종자를 지키고 식량 자급률도 높일 수 있습니다. 농촌을 지키는 중소농 지원 정책을 버린 채 대농 위주로 농촌을 재편하려는 시도는 식량도 포기하고 결국 도시를 지탱하는 농촌을 붕괴시키는 과정일 뿐입니다.
11월 민중 총궐기 때 정부의 위법적인 물대포 공격을 받아 사경을 헤매고 계신 백남기 어르신은 적정한 쌀값과 올바른 농촌,농업 정책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농부의 정당한 주장을 물대포로 깔아뭉개는 한국에서 올바른 종자 정책과 농촌 정책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백남기 어르신의 사례는 불행하게도 종자와 농부, 농촌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디 어르신이 다시 일어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