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회 지역보도부문 뉴스상_일용직 판매사원의 쓸쓸한 죽음_MBN 안진우 기자

드라마 ‘송곳’에 빠지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드라마 ‘송곳’
 
주말 9시 40분, 별다른 일이 없으면, 아니 다른 일을 제쳐두고서라도 나는 TV 리모컨을 손에 쥔다. 드라마를 보기위해서다. 내가 보는 드라마 속에는 재벌도, 불륜도 출생의 비밀도 없다. 매회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웰메이드 드라마’는 바로 ‘송곳’이다.
드라마 ‘송곳’은 동명의 웹툰이 바탕이다. 만성 신부전증 때문에 신장투석을 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악몽을 꾸면서도 ‘시시한 약자들’ 곁을 떠나지 못해 하루하루 고된 싸움을 이어가는 남자, 부진노동상담센터 소장 구고신과 푸르미 마트의 이수인 과장.
드라마는 외국계 대형마트의 중간관리자 이수인 과장이 직원을 해고하라는 회사의 지시에 맞서 노조를 조직해 대응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드라마는 실제 2003년 경기 부천 ‘까르푸’ 신중동점에서 벌어진 실화다.
이 드라마의 재미와 감동은 핵심을 찌르고 가슴을 후벼 파는 구고신 소장의 시린 말이다.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 “인간의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이런 건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데, 독일은 초등학교에서 모의 노사교섭을 1년에 여섯 번 한답니다. 요구안 작성, 홍보물 제작, 서명 운동, 연설문 작성까지…”
드라마 속 구고신의 대사는 송곳처럼 나의 인식을 찌른다. 노동법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송곳’은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았고, 10년이 넘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몰랐던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을 가르친다.
드라마 ‘송곳’은 단순히 TV를 보는 게 아니라 이수인 과정 역을 맡은 배우 지현우의 말처럼 “‘몸에 좋은 한약’을 먹는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다.
하지만, ‘웰메이드 드라마’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는 왜?”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다.
 
뭉툭한 바늘로 찌른 찜찜한 기사
 
드라마 ‘송곳’에 빠져든 건 어쩌면 비정규직, 시간제 근로자의 죽음을 취재하면서 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드라마가 시작된 건 지난 10월 24일, ‘40대 일용직 판매사원의 쓸쓸한 죽음’을 다룬 기사는 하루 전인 23일 취재가 시작됐다.
10년 넘게 백화점에서 판매사원으로 일한 40살 여성 박 모 씨, 백화점은 사실상 1년 내내 할인행사가 열린다. 나도 가끔 그녀가 숨진 백화점의 행사장을 찾는 사람 중 하나다.
그녀가 숨진 날도 백화점에서는 할인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백화점 9층 행사장에서 ‘아웃도어 특별전’에서는 일하던 박 씨의 일당은 6만 원. 백화점 행사장 이곳저곳을 떠돌며 일한 박 씨, 그녀는 직원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화장실에 간다던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동료가 화장실의 잠긴 문을 열어 그를 찾았지만 이미 숨진 상태였다. 사인은 급성 심장마비.
백화점에서 일하던 직원이 숨졌지만, 백화점 측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10년 이상을 백화점에서 일했지만, 숨진 여성은 입점업체가 고용한 단순 아르바이트였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본래의 직업이 아닌, 임시로 하는 일’, ‘부업’으로 순화해서 쓸 수 있다고 표기 돼 있다. 10년째 국내 굴지의 백화점에서 붙박이로 일하다 직원 화장실에서 쓰러진 숨진 40대 여성, 그녀의 신분이 과연 ‘아르바이트’였을까?
유족들은 산업재해보상을 알아보고, 백화점 측에 산재 처리를 요구했지만 “백화점과 직접 고용관계를 맺은 게 아니라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백화점 측의 답변은 현행법상 맞는 얘기다. 숨진 여성은 10년 이상을 백화점 행사 매장을 떠돌며 일했지만, 백화점 측과 고용계약을 맺지는 못했다. 숨진 여성은 백화점 입점업체에서 고용된 아르바이트. 그런데 그녀는 입점업체와도 근로계약서조차 작성하지 않았다. 일은 했지만, 고용주가 없는 것이다.
박 씨가 숨진 백화점에서 일하는 근로자는 3400여명, 이 가운데 백화점이 직접 채용한 정규직은 4.3%인 150명에 불과하다. 3천명이 넘는 근로자는 비정규직이다. 더 놀라운 건 숨진 박 씨와 마찬가지로 근로계약서도 한 장 없이 이 매장 저 매장을 떠도는 아르바이트가 수백 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짧은 노동 상식으로 취재를 하는 내내 드라마 ‘송곳’을 떠올렸다. 구고신이라면? 이수인 과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관련 기사를 검색하고, 관련법을 뒤져봤지만 노동법에 무지한 기자의 기사는 날카로운 송곳처럼 판매사원의 죽음 뒤에 숨겨진 대형 유통업체의 감쳐진 폐부를 찌르지 못했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파견형식으로 일한 사실, 대형 유통업체의 기형적 판매구조. 무지한 기자는 이렇게 기사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찜찜함을 남긴 취재가 분명했다.
‘40대 일용직 판매사원의 쓸쓸한 죽음’이란 기사를 마무리 하는 동안 드라마 ‘송곳’은 회를 거듭했고, 주말 저녁 9시 40분이면 나는 여전히 TV 앞에 자리를 잡는다.
구고신 소장은 말한다. “학교 과정에서의 근로기준법 교육은 스스로 존중받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을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12부작인 드라마는 이제 10회를 넘기고, 2편이 남았다. 남은 2편의 드라마가 무지한 기자가 기사로 다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대신해 주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