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회 뉴스부문_車 대리점 영업사원 노동권 사각 단독 연속보도_KBS 홍성희 기자

송곳 같은 인간을 만나다
 
JTBC 드라마 ‘송곳’에서 노무사 구고신의 대사를 듣고 전율했던 기억이 납니다.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저 자신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여러 노동 현장을 취재하면서 딱 이 대사에 걸맞은 사람들을 봐 왔습니다. 물론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인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송곳 같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삽니다.
 
정장에 서류 가방을 멘 노조위원장
자동차판매노동자연대 노동조합의 김선영 위원장은 그런 ‘송곳 같은 인간’ 중 하나입니다. 제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0월 초쯤입니다. 첫 인상은 전형적인 영업사원이었습니다. 잘 빼 입은 고동색 정장에 영업사원이라면 으레 들고 다닐 법한 서류 가방과 노트북 가방을 메고 있었습니다. 머리에도 스프레이를 뿌린 듯 힘이 들어가 있었죠. 노조 조끼를 입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노조 간부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노조를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동료들에게 노조 가입을 권유하는 메시지를 돌린 뒤 채 일주일이 안 돼 사측의 탄압이 시작됐습니다. 대리점 대표는 그가 스스로 일을 그만두게 만들려고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폭언으로 하루 종일 그를 괴롭혔습니다. 심지어 때리고 목을 조르고 발로 차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폭행 장면이 담긴 CCTV를 보면서 저도 제 눈을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해고의 빌미가 될까봐 대들지도 못 하고 그는 묵묵히 폭력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다고 했습니다.
 
권리는 누가 거저 주는 게 아니다
김 위원장과 동료들이 이런 고통을 참아내면서 노조를 만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노동조합의 ‘노’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스로가 노조 간부가 될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도 없었을 겁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절박감이 이들로 하여금 노조를 만들게 했습니다. 자동차 대리점 영업사원들은 퇴직금과 4대 보험은 물론, 기본급도 없습니다. 또 휴일 수당도 없이 휴일에 나와 일해야 합니다. 게다가 대리점을 옮기려 하면 기존 대리점 대표로부터 동의서까지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대리점 측의 답변은 같았습니다. ‘너희는 용역 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이지 근로자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론 철저한 근태 관리부터 본사의 감사까지 받아 사실상 근로자나 다름없었습니다.
 
드라마 송곳의 구고신은 마트 직원들을 대상으로 노조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들한테 우리는 인간 아니에요. 뺐어도 화 내지 않고, 때려도 반격하지 않으니까. 두렵지 않으니까.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살아있는 인간은 빼앗으면 화를 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
 
권리라는 건 누군가가 거저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권리는 스스로가 힘을 키우고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무엇이라는 겁니다. 저는 자동차 대리점 영업사원들도 바로 이 길을 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측에 읍소하거나 어떤 외부의 힘에 의존하는 식으로는 권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하지만 일부 정치인들이 확신에 찬 말투로 ‘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합니다. 과연 현실을 잘 알고 하는 얘기인가 의문입니다. 저는 이번 취재를 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노동 문제는 노동자 스스로 힘을 키워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노조가 잘 조직이 돼 있어서 사측과 교섭할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단체협약을 통해 저임금 문제든 비정규직 차별 문제든 스스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관련 정책을 쏟아내며 헛심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하거나 스스로 관두도록 괴롭히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노조 활동이라는 헌법상의 권리가 온전히 구현될 때까지 기자로서 감시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