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회 기획보도부문_ 직장내 괴롭힘 보고서-인격 없는 일터_KBS 김연주 기자

직장 내 괴롭힘을 말해야 하는 이유

“당신은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입니다. 원한다면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입증 책임은 회사에 있습니다. 당신의 탓이 아닙니다.”
전문가로부터 상담을 받은 손일곤 씨의 얼굴에 잠시나마 미소가 떠올랐지만 더 큰 한숨이 따라왔다. 상담이 이뤄진 곳은 한국이 아닌 프랑스였다. ‘직장 내 괴롭힘’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프랑스의 기준에서 손 씨는 보호받아야할 피해자였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전혀 달라질 것이 없을 터였다. 어렵게 프랑스까지 함께 왔는데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던 순간, 손 씨의 표정이 다시 밝아진다.
“그래도, 제 탓이 아니라고, 피해자로 인정받으니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됩니다.”
* ‘피해자로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
KT 사무직이었던 손 씨는 지난해 희망퇴직을 거부한 뒤 신설된 부서에 배치돼 1년 가까이 전단지 수거나 모뎀회수 등 단순 업무를 반복하고 있다. 업무배제와 따돌림 등으로 직장에서의 자존감이 꺾일 대로 꺾인 손 씨는 자녀들에게 직장에서 하는 일을 제대로 말할 수 없어 괴로워했다. 경기도에 사는 손 씨는 지난 2009년엔 전남 고흥으로 갑자기 발령이 나 5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내기도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손 씨의 마음은 피폐해졌지만, 회사에서는 정당한 인사권과 업무지시권을 내세웠다. 법에도 호소해봤지만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판결이 돌아왔다.
손 씨를 비롯해 취재진이 만난 근로자들은 무엇보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 경쟁이 심화된 업무환경 군대같은 수직적 조직문화 속에서 이들은 업무배제, 따돌림, 모욕, 과도한 실적압박 등에 시달리면서도 모든 괴로움의 이 자신의 성격이나 무능력에 있다는 자책감에 짓눌려 있었다. 적어도 ‘네 탓이 아니야’ 라는 위로가 필요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해외에서는 1990년 초반부터 근로자의 정신건강을 반드시 보호해야할 영역으로 보고,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다양한 규제를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정의조차 제대로 논의되고 있지 못하는 실정이다.
기업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이 직장 생활의 모든 불만을 토로하는 ‘깔때기’가 될까 두려워한다. 취재 도중 만난 기업 인사 관리자들은 ‘단순히 본인이 일을 하기 싫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호소하면 어떻게 기업 운영을 하겠나’라는 말을 많이 했다. 이에 대한 해답도 해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일본은 지난 2012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이후 회사 내에서 관련 갈등이 늘고 있지만,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공론화의 긍정적 효과가 크다고 했다. 직장 안에 괴롭힘 방지 부서를 운영하고 있는 한 제약회사 상무는 “직원들이 존중받으며 일을 한다는 생각에 근무 만족도가 높아지고 업무 태도도 능동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 공포심으로 직원 길들이기는 이제 그만
직원을 위해서도, 회사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지만현실은 녹록치 않다. 구조조정, 비정규직 차별, 노조탄압의 수단으로 이른바 ‘찍힌’ 직원을 괴롭혀서 내보내 ‘전략’을 채택한 기업들도 많다. 겉으로는 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한다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직원 퇴출을 목적으로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탈법적인 퇴출프로그램을 관리했던 한 증권사의 전직 임원은 “퇴출프로그램은 해당자를 괴롭혀서 내보내는 것 외에 다른 직원들에게도 공포심을 줘서 직원을 길들이는 효율적인 수단이 됐다”는 말을 했다. 직장 내 괴롭힘이 단순한 언어순화교육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가해자의 인성문제가 아닌 조직적인 문제로 바라볼 때 직장 내 괴롭힘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어쩌다가빚어진, ‘뜻밖에얻어진 프로그램
1분20초 리포트가 아닌 1시간짜리 시사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어쩌다가’라는 우연 남발의 표현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해 11월 기획안을 냈을 때만해도 보이지 않고, 교묘하게 숨겨진 괴롭힘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지, 무엇보다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잘 전달할 수 있을 지 너도나도 걱정이었다. 그러나 취재를 시작하고 얼마 뒤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이 터지면서 직장 내 부당한 갑을관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500명을 목표로 했던 설문조사는 7개 업종 5922명이라는 엄청난 응답률을 보였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숨어있는 목소리들을 확인했던 순간이었다. 국제 통상적인 수준보다 1.5배 높은, 16.5%라는 피해율을 어떻게 줄여나갈지가 앞으로의 숙제다.
이 모든 과정에는 취재에 응해준 사례자들을 비롯해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등 수많은 분들의 도움이 숨어 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원고부터 편집까지 꼼꼼히 짚어주신 안양봉 팀장, 밤샘 편집으로 완성도를 높여주신 이종환 편집요원, 설문조사를 담당한 김대석씨 모두 고맙고 수고하셨다. 아픈 와중에도 용기를 북돋워준 동기 임모 씨에게도 특히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