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회 기획다큐부문_ 연속 보도_뉴스타파 이유정 기자

작년 4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 즉 ICIJ로부터 ‘새로운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받았다. 2013년 전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조세피난처 프로젝트 이후 ICIJ가 다시 새로운 프로젝트에 착수하면서 취재 협력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조세피난처였다. 유럽 내 조세피난처로 악명 높은 룩셈부르크를 이용하는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조세회피 실태가 담긴 문서들을 입수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서에 한국의 ‘국민연금공단’이 포함되어 있다고 알려줬다. 뜻밖의 이름이었다.
 
 
안에서 찾기 힘들면 밖에서국제 공조 취재의 장점
ICIJ가 입수한 28,000여 페이지의 문서를 처음 접하는 순간 막막함이 엄습했다. 룩셈부르크 조세당국과 다국적 기업들의 자문을 맡은 회계법인 PwC 간의 비밀 사전 과세협정이 담긴 문서들을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민연금의 경우 프랑스와 독일에 있는 부동산에 투자하면서 조세피난처인 룩셈부르크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드는 복잡한 투자 구조를 설계해놨다. 이런 구조가 어떤 식으로 조세회피를 돕는지 파악하기 위해선 각국의 조세정책, 해당 국가 간 조세 협정 등을 이해하고 실무적 경험을 가진 전문가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그런 전문가 중 국내 최대 규모 기관 투자자인 국민연금과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는 사람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자문을 구할 전문가를 찾는 일이 국내에서 계속 난항에 부딪히자 ICIJ와 다른 나라 취재 파트너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해외 전문가를 찾기 시작했다. 국제 공조 취재의 장점이었다.
 
국민연금 측은 룩셈부르크에 만든 페이퍼컴퍼니를 통하는 복잡한 구조로 짜여진 투자 방식이 절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투자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해외 조세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투자 행태가 OECD 등이 대표적 조세회피 수법으로 규정한 BEPS(세원잠식과 소득이전)에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조세회피를 근절하기 위한 국제사회 노력에 한국 정부가 동참하고 있는 상황에서 준정부기관인 국민연금의 이런 투자 행위가 얼마나 모순적인지 지적했다. 이런 내용이 담긴 첫 보도 “국민연금 해외부동산 대부분 조세피난처 통해 투자…논란 예상”이 ICIJ로부터 처음 메일을 받은 후 약 반년이 넘는 취재 기간을 거쳐 나가게 됐다.
 
 
국민에게만 비밀인 국민연금의 해외 부동산 투자 성과
ICIJ 문서를 통해 국민연금의 조세피난처 이용 사실 뿐 아니라 투자의 상세한 구조를 최초로 확인하게 되면서 취재는 국민연금의 해외 부동산 투자 실태로 확대됐다. 국민연금이 프랑스, 독일 등에 있는 부동산에 투자하면서 만든 룩셈부르크 지주회사와 현지 부동산 관리 회사들의 재무제표 등을 해외 기업 공시 정보 사이트 등을 통해 입수할 수 있었다.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 독어, 불어 등을 해석하며 자료를 찾는 일 때문에 꽤 애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찾아낸 자료를 전문적인 회계 관련 지식과 용어로 정확하게 번역해야 했는데 이 또한 수월하지 않은 작업이었다. 전문 번역을 맡겨도 제대로 된 용어로 번역이 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현지 취재 파트너들이나 전문가들에게 다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이런 자료 확보보다 취재를 더 어렵게 만든 건 국민연금의 태도였다. 해외 부동산 투자와 관련된 자료 요청에 투자전략 노출 우려, 위탁 운용사와의 비밀 계약 등을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국회에서 자료를 요청해도 마찬가지였다. 자료 요청 뿐 아 니라 사실관계 확인을 위한 질문에도 응해줄 수 없다는 답변만 반복됐다. 국민이 낸 연금의 운용 내역과 투자 성과가 철저히 베일에 감춰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해외 기업 공시 정보 사이트 등에서 자료를 찾던 중 국민연금과 부동산 지분을 같이 보유하고 있는 해외 기업들은 투자 수익률 등을 공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국민연금의 비밀주의가 더더욱 납득하기 어려워졌다. 해외에서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국민연금의 불투명성과 그 뒤에 감춰진 저조한 투자 실적을 폭로하는 기사를 연이어 내보냈다.
 
보도가 나가자 국민연금이 처음으로 일부 해외 부동산 투자 수익률을 공개하는 등 그동안의 불투명성을 다소 해소하려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위탁운용사와 관련된 부분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철저한 비밀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이번 취재를 통해 국민연금이 고수하는 비밀들이 다른 곳에서는 버젓이 공개되고 있는 실태를 확인하면서 국민연금의 비밀주의가 얼마나 모순되고 불합리한지 확인했다. 국민연금의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인 연금 수급자 국민을 위해 기금운용의 투명성이 보다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의 끊임없는 감시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