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회 뉴스부문_2015 수능 생명과학 출제 오류 연속보도_KBS 이은정 기자

과학적 진실이냐? 출제자의 의도냐?
지난해 수능 세계지리 문제가 법정까지 가는 진통을 겪었던 탓에 올해 수능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답 오류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것은 생명과학 II 8번 문제로 이의신청이 폭주했다.
생명과학을 전공한 탓에 호기심을 갖고 문제를 훑어보았다. 예상 외로 문제가 어려웠다. 대학 시절 배웠던 유전자 ‘오페론’과 관련한 내용인데 요즘 고등학생들은 이런 어려운 것을 공부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학창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으며 풀어보니 나도 정답이 헷갈렸다. 생명과학을 전공한 주변 지인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고 전문가는 누구일까? 물어물어 찾아보니 서울대 생명과학부에서 미생물 유전자 연구를 하는 교수님이었다(개인적으로 나의 은사님과 선배님이다). 이들의 대답은 명쾌했다. 중합효소는 ‘프로모터’에 결합하는 것인데, 단순히 조절 유전자에 결합하는 것처럼 기술됐기 때문에 지문이 틀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답을 정정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다른 유전학자들에게 추가로 더 자문을 구했는데 의견은 한결 같았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측이 제시한 정답이 틀렸다고 확신할 수 있었고 바로 보도를 준비했다. 수능이 치러진 이틀만인 11월 15일 KBS는 9시 뉴스 첫 아이템으로 ‘올해 수능 생명과학 8번 문제 정답 오류’를 보도했다.
 
KBS의 보도 이후 교육부와 평가원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험생들의 이의신청이 쏟아졌을 초기에는 짐짓 이 문제를 회피했던 교육 당국이 공식적으로 학회에 문제 검토를 맡기기로 했다. KBS 취재팀은 평소 안면이 있던 과학자들을 밀착 취재한 결과 평가원이 자문을 구한 3개 학회 가운데 한국미생물학회와 생화학분자생물학회 2군데를 알아내고, 이들 학회의 심사 현장을 직접 찾아다녔다. 이와 함께 정답 정정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후속 보도와 수능 출제와 검토 시스템의 문제점 등을 심층 보도했다.
11월 19일 오후, 학회가 평가원측에 자문 결과를 넘겨준 것을 파악하고 여러 교수들을 접촉한 결과 한국미생물학회는 ‘정답이 잘못됐다’는 학술적인 의견을, 생화학분자생물학회는 ‘복수정답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낸 것으로 확인했다. 그때가 오후 6시를 넘은 시간. 부랴부랴 보고를 하고 9시 뉴스 첫 꼭지로 학회들의 회신 내용을 단독 보도할 수 있었다. 수능이 치러진 지 1주일, KBS가 정답 정정 의견을 제시한 지 5일만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첫 보도를 하면서부터 교육당국이 정답을 바꾸어야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과학적 사실이 너무나 명쾌하기 때문에 피해갈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KBS의 보도 이후에도 다른 언론들은 ‘답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양비론식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다보니 교육부에서도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으니 뭐라고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지난해 세계지리 사태에서 보듯이 교육당국에서 엉뚱한 결론을 내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또 과학자들 중에는 학술적으로 문제가 잘못됐다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정답과는 분리해 생각하는 일부 견해가 있었다. 주로 고교생 자녀가 있어 문제풀이를 해봤던 ‘학부형’ 교수들이었는데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 문제를 푸는 것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팀은 지난해 세계지리 사태처럼 생명과학 문제도 재판까지 갈 수 있다는 각오로 취재에 임했다. 하지만 해당 학회의 자문 결과, 정답이 확실히 잘못됐다는 결론이 나왔고 교육 당국은 이례적으로 주말 브리핑을 통해 복수 정답을 인정했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 나는 7년 전 이맘 때를 떠올렸다. 2008학년도 수능시험 물리 II 문제에서 정답이 잘못돼 KBS가 단독 보도를 했고 교육 당국과의 실랑이 끝에 정답이 바뀌는 소동을 겪었다. 이번에 생명과학분야 학회들이 나섰던 것처럼 그때는 한국물리학회가 복수 정답을 인정해야 한다는 공식 기자회견을 했다. 평가원은 당시 3일을 버티다 복수정답을 인정했다. KBS 보도가 실마리가 되어 학회들이 공식 의견을 냈고 이 때문에 평가원장이 물러난 것까지 데자뷰처럼 똑같다. 나는 수능 시험 때문에 두 번이나 기자상을 받게 됐는데 이 상은 모두 과학적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 용감하게 의견을 밝혀준 과학자들 덕분이다.
또 기자 생활 20년이 넘어가면서 특종은 한두 언론사의 보도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타 언론들이 함께 해야 정부의 기존 입장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생명과학 문제 오류 기사도 여러 언론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취재 경쟁을 벌였고 우리팀이 놓쳤던 새로운 사실을 추가 보도한 기자들도 많았다. 수능 출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수많은 교육 담당 기자와 해당 문제를 적극적으로 탐구한 과학 기자들이 다함께 이뤄낸 성과라고 생각하며, 함께 고생한 동료 기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기사 가운데 제대로 된 기사를 보면서 우리끼리 ‘선수’를 알아보게 되는 것도 기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쏠쏠한 재미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