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회 기획다큐부문_시사기획 창-회장님의 나라는 어디입니까?_KBS 김시원 기자

한 기업 총수가 있다. 서울의 유명 사립초등학교와 명문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교 4학년 때 아버지의 회사에 입사한다. 졸업 뒤 곧바로 미국에 있는 현지법인으로 발령이 나고 잠시 한국에 들어와 결혼식을 올린 뒤 미국으로 가 자녀를 출산한다. 미국 현지법인을 다니면서 명문대 MBA 과정을 밟았고, 귀국한 직후에는 임원이 된다. 어느 한 기업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 적어도 한국에서 이런 모습은 지난 수 십 년 동안 재벌일가의 로열코스로 여겨졌다.
재벌들의 화려한 이력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해외여행조차 자유롭지 않던 시절, 어떻게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동시에 회사에 근무할 수 있었을까. 외화 유출이 엄격히 금지됐을 때 어떻게 미국에 집을 사서 자녀를 출산하고 미국시민권을 선물할 수 있었을까. 재벌이라면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 당연한 걸까. 아무리 총수 일가라 할지라도 만약 회사가 조직적으로 개인의 출산이나 교육 문제 등에 개입하는 건 문제인 것 아닌가. 하지만 국적 포기와 선택은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권리가 아닌가. 물음표 속에 갈팡질팡 취재를 시작했다.
시작은 막연하고 험난했다. 대상자로 10대 재벌일가 천여 명을 잡아 놓긴 했는데 우리가 몇 명의 국적을 알아낼 수 있을까. 베일에 가려진 자녀들의 국적은 또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무모하지만 단서는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펴내는 관보 데이터가 그것이다. 정부 관보(법무부 고시)에는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거나 외국 국적을 취득해 한국 국적이 상실된 사람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본적 등이 나온다. 최근 35년 치를 목표로 잡고 지난 1980년부터 2000년까지 35년 치의 관보 내용을 엑셀로 옮겨 넣었다. 2001년 이후의 전자관보 내용은 PDF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52만 건의 데이터를 확보했다. 이 데이터와 취재 대상자 천여 명을 일일이 대조했다. 주소와 생년월일 등을 검증해 동일인 여부를 확인했다. 백여 명이 나왔다. 예상보다 적었지만 취재를 시작할 수 있는 단초를 잡은 셈이었다.
국적은 하나의 단서일 뿐이다. 그들이 외국 국적을 딴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것을 통해 어떤 권리를 누리고 어떤 의무를 회피하는지 밝혀내는 게 취재의 목적이었다. 취재를 교육과 병역, 납세의 의무 이 3가지로 압축해 불법은 없는지, 반칙은 없는지 살펴봤다.
먼저 2년 전 검찰이 수사했던 외국인학교 부정입학 문제에 주목했다. 과연 검찰이 적발한 게 전부일까. 어쩌면 꼬리만 나온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SNS 데이터 수집을 통해 재벌일가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확인해 어떤 자격으로 입학했는지 취재했다. 학교 별로 접촉을 했고 국회의원실의 협조도 구했다. 오로지 외국인학교 입학을 위해 제3세계 국가의 국적을 취득하거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병역의무 회피 여부는 검증 방법이 막막하고 결론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출생 데이터를 통해 미 국적자를 추린 뒤 그 사람의 나이와 그동안의 이력, 주된 생활 지역 등을 감안해 개개인 별로 접촉할 수밖에 없었다. 당초 취재팀의 우려와 달리 대상자들은 외의로 병역 의무 회피를 부인하지 않았다. ‘난 한국인이지만 미국 시민권자여서 병역을 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국적에 대한 인식이 다른 셈이다. 시리즈 1·2편인 <회장님의 미국땅> <회장님의 수상한 법인>을 취재하면서 미국 현지에서 들었던 내용들도 도움이 됐다. 회사 자금을 이용해 자신의 모교에 거액을 기부하고 자신의 자녀에게 부(富)뿐 아니라 교육까지 대물림하는 재벌들의 행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돈과 지위에 의한 특권행사를 자연스럽게 용인하는 것 같다. 당사자들은 남들이 모르고 처벌받지 않으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반칙을 통한 특권’을 부러워하고 따라 하기도 한다. 프로그램을 만든 건 그래서다. “당연해 보였던 재벌들의 출생과 교육, 부의 대물림 이면에 이런 일들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시청자들께 여쭤보고 싶었다. 막막함으로 시작해 아쉬움 속에 끝났지만 좀 더 노력하겠다고 약속드린다. 당연해 보이는 주제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데 도전하고 싶다. 심사위원들께 깊이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