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회 기획다큐부문_ 대한민국 피겨, 김연아 이후를 말한다_KBS 강재훈 기자

지난 2월 막을 내린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 국가대표 김연아의 은퇴 무대였다. 온 국민이 응원했던 김연아의 올림픽 2연패도 판정 논란 끝에 무산돼 아쉬움을 더했다. 대회가 끝나고 ‘제 2의 김연아’를 육성해야 한다는 언론 보도가 쏟아졌다. 좀 더 긴 호흡으로 ‘김연아 이후 대한민국 피겨’를 다뤄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어쩌면 피겨 전용 빙상장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소치 올림픽 기간 동안 맡겨진 업무로 바쁜 중에도 틈틈이 자료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대회가 끝나자마자 부지런히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해외 섭외도 시작했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고 나서야 <시사기획 창>팀을 찾아가 아이템 발제를 했다. 방송날인 5월 6일이 김연아의 은퇴 기념 아이스쇼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에 시의성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아이템이 받아들여지면서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갔다.

방송을 준비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왜 피겨인가?’였다. 사실 국가대표로 상징되는 우리나라의 엘리트 스포츠는 대부분 정부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쓸 수 있는 재원은 한정돼 있고, 모든 경기 단체들이 손을 벌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피겨를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당위성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열악한 환경이니 지원해야한다”는 원론적인 얘기가 아니라 “피겨가 국가적으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스포츠”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통의 피겨 강국 러시아를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모스크바에 있는 여러 피겨 학교들은 피겨 전용 빙상장이 필요한 이유를 보여줬다. 생활 체육과 엘리트 체육을 결합시켜 유망주를 체계적으로 조기 육성하는 시스템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문제는 섭외였다. 소치 동계올림픽 직후 김연아 판정 논란이 국제빙상연맹 제소로 이어지면서 러시아와 불편한 관계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러시아 피겨연맹의 취재 협조를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이웃나라 일본도 눈여겨 볼만한 사례였다. 일본빙상연맹은 정부 지원에 의존하기에 앞서 자생력을 갖춘 조직으로 거듭났다. ‘피겨 스타 발굴->국제대회 유치->수익 창출’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 것이다. 정작 현지 취재는 일본빙상연맹의 의도적인 방해로 애를 먹었다. 인터뷰 약속은 이유 없이 취소됐고, 현지 빙상장 촬영은 “연맹의 허락을 받아야한다”며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결국 연맹 사무실까지 찾아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치 동계올림픽 당시 일본빙상연맹이 한국 기자들과 마찰을 빚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의문이 풀렸다.

‘제 2의 김연아’를 꿈꾸는 선수들에게 절실한 것은 피겨 전용빙상장이다. 피겨를 막 시작한 초등학교 선수들은 빙상장 대관에서 밀려 새벽이나 심야에 스케이트를 탈 수밖에 없다. 한창 성장해야 할 나이에 늘 잠이 부족하고, 학생 선수인데도 학업을 병행하기 힘들다. 경제적 부담도 꿈을 포기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다. 빙상연맹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모든 짐은 학부모가 감당해야 한다. 피겨 국가대표도 예외가 아니다. 전용빙상장은 많은 피겨 선수들에게 안정적인 훈련 환경을 주는 동시에 경제적 부담도 덜어줄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취재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제작을 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심각하게 아이템을 접을 생각까지 했다. 애도 분위기 속에 김연아 아이스쇼가 예정대로 열리면서 이번 아이템도 그대로 방송됐다. 결과도 좋았다. 전국 7.8%, 수도권 8.2%(AGB닐슨 기준)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상대적으로 시청률이 떨어지는 연휴 기간이었음을 고려하면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방송이 나간 뒤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피겨 전용빙상장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문광부는 “빙상장 설계비를 2015년도 자체 예산에 포함시켰다”고 밝혀왔다. 기획재정부 검토에 이어 오는 연말 국회의 최종 승인을 거쳐야 하지만 통상적으로 자체 예산에 포함된 사업은 무리 없이 진행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다. 피겨계의 숙원이었던 피겨 전용 빙상장이 현실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갈팡질팡하던 평창 동계올림픽 빙상경기장들의 사후 활용안도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문광부와 강원도는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장과 남자 아이스하키 경기장을 대회 이후 철거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대회 이후 운영비 적자로 인한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한 일이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만큼 쉽지 않았겠지만 용기 있는 결정이다. 이와 함께 취재팀이 문제로 지적했던 태릉빙상장 이전 문제도 조만간 출범할 올림픽 협의체에서 주요 안건으로 다룬다고 문광부는 밝혔다. 이 역시 마무리가 잘 될 때까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정부의 지원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결국 대한민국 피겨 발전을 고민해야 하는 것은 해당 경기 단체의 몫이다. 하지만 대한빙상연맹이 전체 빙상 종목 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는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전횡을 휘두르던 임원의 퇴진, 승부 조작과 각종 추문, 그리고 정부의 특별 감사까지. 빙상연맹은 심각한 내홍을 앓고 있다.

대한빙상연맹을 이끄는 사람은 바로 김재열 삼성 엔지니어링 사장이다. 김재열 회장은 이건희 IOC 위원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 때문인지 김 회장은 지난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선수단장을 지냈고, 현재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피겨 발전을 위해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취임 이후 행보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다. 부디 “김재열 회장은 그저 체육단체장이라는 자리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는 체육계 일부의 비난 여론이 기우에 그치기를 바랄 뿐이다.

제작 기간이 너무 짧아 힘들었고 아쉬움도 크다. 아이템이 확정되고 방송 예정일까지 주어진 시간은 불과 한 달 여. 많은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취재 후기가 아니라 시말서를 쓰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격려를 아끼지 않은 스포츠제작부 이기문 부장과 김민철 팀장, 탐사제작부 이승환 팀장, 정소연 작가, 그리고 끝으로 묵묵하게 뒤에서 응원해준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