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회 기획다큐부문_ 의문의 형집행정지_MBC 임소정 기자

귀를 의심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하지만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진실했습니다. 만사 제쳐두고 이 분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2월, 이화여대 앞에서 고 하지혜 양의 아버지를 그렇게 만났습니다.  

지난 2002년 부산 모 재벌기업 사모님이 사위의 이종사촌 여동생 하지혜 양을 불륜상대로 잘못 의심하고, 청부살인까지 저지른 ‘이대 법대생 공기총 살인사건’. 2002년 이화여대 1학년에 재학 중이었지만, 부끄럽게도 고 하지혜 양 아버지의 입을 통해 처음 접한 이야기는 2천년대에 일어난 일이라곤 믿기 어려웠습니다. 뒤에 이어진 말은 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당시 청부살인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수감됐던 사모님 윤모씨가 감옥 대신 6년 넘게 세브란스 병원 VIP 병실에서 지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딸을 잃은 뒤 산속에 묻혀 지내고 있다는 하지혜 양의 아버지. 윤모씨가 입원했다던 세브란스 병원 근처 식당에서 아버지는 밥 한 술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줄곧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여대생을 청부살인한 주범이 어떻게 감옥이 아닌 호화병실에서 지낼 수 있을까. 하지만 증거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이런 사실을 전한 제보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함구를 부탁했습니다. 윤모씨는 더 이상 세브란스 병원에 없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까. 막막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경기도의 한 병원 특실로 옮겨 입원중인 윤 씨를 찾아냈습니다. 제보자가 본 세브란스 병원 주치의의 진단서에 따르면, 윤 씨는 거동조차 불가능한 상태여야 했습니다. 예상한대로 윤 씨는 그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결정적인 증거확보가 문제였습니다. 특실병동의 특성상 간호사들의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혹시 모를 윤 씨의 외출에 대비해 한 팀은 서울 청담동 빌라 앞에서, 한 팀은 아예 병원에 입원을 해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두 달 가까이 멀쩡히 거동도 하고, 식사도 잘하는 윤 씨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겉모습으론 불충분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세브란스 병원 내부로부터 주치의의 진단서와 윤 씨가 10여개 과의 전문의들에게 협진을 받은 의료기록, 간호기록지를 입수했습니다. 주치의의 진단서와 의료기록의 내용은 달랐습니다. 실제 윤 씨를 진료한 전문의들은 의료기록이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진단서가 잘못됐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대한의사협회의 협조를 받아 다른 병원의 전문의들에게 분석을 부탁했습니다. 역시 주치의의 진단서가 왜곡된 것 같다는 의견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그 중 한 전문의는 ‘이 환자가 병원 이사장의 가족이냐며, 이런 진단서를 작성하긴 어렵다’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취재가 끝난 뒤 만난 윤 씨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방송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진단서를 써준 세브란스 병원 주치의도, 윤 씨가 당시 입원 중인 일산병원 주치의도, 누구 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검찰은 형집행정지 사유를 밝히라는 수십 번의 정보공개청구에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며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습니다. 

방송이 나간 직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가 빗속에 1인 시위를 할 때도, 대검찰청이 모든 형집행정지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한 뒤에도, 윤 씨에게 진단서를 써준 주치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자들을 진료했습니다. 그동안 윤 씨는 또 다시 다른 병원으로 전원을 시도했습니다. 윤 씨의 남편인 부산의 재벌기업 회장 류모씨는 언론중재위에 취재진을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그것이 알고싶다> 팀에 의료기록과 언론중재위를 통해 윤 씨 측이 보내온 서류, 증거화면 등 모든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방송이 나간 지 이제 두 달. SBS 방송 전 윤 씨가 재수감됐고, 이후 검찰이 세브란스 병원을 압수수색하기까지 흘러왔습니다. 하지만 부산 재벌기업의 사위이자 고 하지혜 양의 사촌오빠인 변호사 김모씨가 윤 씨의 딸과 잘 살아가고 있는 반면, 지혜 양의 가족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짧은 방송시간 안에 모두 말하지 못한 것들도, 그와 함께 아직 해결돼야 할 일도 남아있습니다. 특히 검찰에게 말입니다.    

방송 사흘 전, ‘적법한 절차에 따라 형집행정지가 연장됐다’는 입장만을 내놓던 서울 서부지검 차장검사는 부랴부랴 세브란스 병원에 ‘대외비’ 공문을 보내 지난 해 12월 형집행정지 연장 당시 윤 씨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전화를 걸어 윤 씨가 당시 집중치료를 받았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방송을 재검토하는 게 좋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지금은 차장검사가 바뀌었지만, 주치의에 대한 수사는 물론 잘못된 형집행정지를 계속해 준 검찰에 대한 진상조사도 철저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보도를 할 수 있었던 건, 1994년부터 우리 사회 면면을 조명해 온 MBC <시사매거진 2580> 선배들의 덕입니다. 고 하지혜 양의 아버지는 2002년 당시 2580에서 지혜 양이 피살당했을 때부터 윤 씨가 구속되기까지 끈질기게 다뤄줬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많지만, 지혜 양 아버지 같은 분들이 계속해 2580을 찾아주게 될 날이 올 거라 믿습니다.   

보도가 나가기 전에도 후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격려해주신 선배들과 후배들, 두 달 간 함께 고생한 스텝들, 기꺼이 협조해 준 대한의사협회, 저를 고 하지혜 양이 보내준 사람이라며 굳게 믿어주신 지혜 양의 아버지와 가족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