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다큐부문_승자독식의 자화상_KBS 박순서 기자

아프간 전쟁의 비극을 다룬 다큐멘터리 가운데 ‘마리나(Marina)’라는 작품이 있다. NHK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로 전쟁의 참상을 이 보다 사실적으로 담아낸 작품을 본 적이 없다. ‘마리나’는 아프간 걸인 소녀다. 걸핏하면 울음을 쏟아내는 마리나의 눈물은 탈레반과 소련, 미국이 얽혀 만들어낸 전쟁의 공포가 아프간에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심어놓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일한 매개체다.
다큐 ‘마리나’가 전쟁의 참상만을 고발한 건 아니다. 시사다큐라고 하면 의례히 무거운 주제를 그럴듯한 논리적 전개와 내레이션으로 담아내야 ‘폼’ 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큰 한국언론 풍토에도 ‘생각’해 볼 여지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다큐를 보는 사람들의 ‘공감’보다 만드는 사람의 ‘만족’에 무게중심이 편중돼 있는 경우를 그동안 적잖이 봐왔던 게 사실이다.
‘승자독식의 자화상’을 기획하면서 가장 컸던 고민은 ‘어떻게 만들지?’였다. 승자독식 구조 로 재편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모두 딱딱한 통계수치들 뿐이 었으니까. 복잡하고 혼란스런 한국사회의 모습만큼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혼란스러울 때 사 람들은 인문학을 찾는 경향이 크다. 단편적인 한두 가지 접근으로는 답을 찾기 어렵기 때문일 것. ‘승자독식의 자화상’ 제작이 ‘인문학적 방법’을 따른 것 이 때문이다.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자는 물론 물리학자와 데이터 마이닝(Data-mining) 전문가들을 닥치는 대로 만났다. 기획 의도를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첫 반응은 “재미있겠다” 였다. 모두들 지적인 호기심들로 충만한 전문가들이었다. 승자독식과 무한경쟁을 키워드로 심리실험과 데이터분석 작업에 흔쾌히 나서줬다. 최대한 공개되지 않았던 분석 방법을 동원 해 제작해보자는 데도 합의했다.
문제는 영상이었다. 승자독식 구조로 재편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자화상을 여과 없이 담아 내려면 ENG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 Canon 5D Mark2는 더없이 좋은 대안이 됐다. 크기가 작은 것도 장점이지만 깊이 있는 심도와 폭넓은 화각으로 한국 사회 속 삶의 ‘풍경’을 담 아내는 데 이만큼 적합한 장비는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4개월 넘게 승자와 패자, 또 경쟁에 뛰어들어 몸부림 치고 있는 삶의 풍경 구석구석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승자독식 무한경쟁의 구조를 내면화 하는 과정과 그로 인해 어떻게 인식이 바뀌고 행동하게 되는지를 분석하는 데는 심리실험 밖에 방법이 없었다. 한 달 넘게 진땀을 뺀 끝 에 실험에 참가할 150명 정도의 학생과 기업체 직원들을 섭외할 수 있었다. 실험시간도 길고 참가 인원도 많아 이번 제작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었다. 실험의 기획과 설계를 맡아준 심 리학과 교수가 섭외까지 나서 도와준 덕에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사회 구성원들이 무한경쟁에 뛰어들어 많은 투자를 하면서 손해를 보는 시점에서도 합리 적인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함정게임>만큼 적합한 도구는 없었다. 프로그램 기획 과정에서 확보한 연구 결과를 실제로 실험해 보기로 했다. 참가자를 무작위로 모으고 스튜디오를 빌리고, 표정 변화를 잡기 위해 6mm 소형카메라를 참가자 전원 앞에 설치했다. 연구 결과로만 나와있지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던 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하지만 예측은 정확했고 참가자들은 손해를 보는 시점이 한참 지났는데도 경쟁구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미국의 연구 결과였지만 한국에서도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승자독식 구조에서 1등이 되고자 끊임없이 경쟁하는 건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평등의 심화, 교육사다리의 붕괴 등은 사회과학적인 분석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관련 데이터를 확보해 GIS와 SNA, Cartogram에 정통한 물리학 교수와 데이터마이닝 전공 교수에게 분석을 의뢰했다.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일목요연하게 시각화하는 데 이만큼 적합한 분석 툴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사다큐의 영역을 협소하게 보는 시각들이 아직도 많다. 한정된 테마 속에서 10년 20년 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제작을 반복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마리나(Marina)’는 어린 소녀에 관한 이야기지만 관객들은 보는 내내 전쟁에 대한 공포와 인간의 비극을 떨쳐버릴 수 없는 다큐멘터리다. 삶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시사(current affairs)다. 그 양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새로운 시각과 접근법을 모색하면 시청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의미있는 테마들은 사실 주변에 널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