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지역기획보도부문_하늘동네 이야기_대전MBC 김지훈 기자

뉴스는 드라마(soap opera)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마치 주인공이 된 듯,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감동한다. 뉴스를 보면서도 마찬가지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드라마는 허구 이고 장기간 지속되는 반면, 뉴스는 사실을 다루고 단기간에 끝난다는 점이 차이다. 드라마 는 다음 편을 보기 위해 손꼽아 기다리는 경우가 많지만 뉴스는 대부분 그저 지나쳐 볼 뿐이 다. 십 수 년째 계속되는 뉴스의 도식화된 틀거리 때문이다. ‘1분 20~30초’라는 시간적 제약과 일회성의 한계 탓에, 드라마의 허구적 내용보다 훨씬 파급력이 클 수 있는 사실을 기반으 로 하면서도 감정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뉴스를 통해 슬픔이나 분노, 기쁨, 감동 등 복합 감정을 체계적으로 전달할 수는 없을까?’, ‘뉴스도 드라마처럼 장기간 지속되면 안 되는 것일 까?’, ‘하늘동네 이야기’는 이런 작은 고민에서 출발했다.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전 세계를 덮친 금융위기, ‘다큐뉴스’ 하늘동네 이야기의 탄생
2008년 가을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덮쳤다. 필자는 당시 한국언론재단에서 진행하는 ‘경제보도 연수’에 참여하고 있었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이 강사진으로 나왔는데 다들 지난 IMF보다 더 힘겨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경제 위기 속 달동네 사람들의 1년을 다뤄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보통사람들보다도 훨씬 힘겨운 생활을 하는 그들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희망을 찾아가는 모습을 뉴스를 통해 내보내면 많은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된 ‘복합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당시 사 회팀이던 본인과 이교선, 고병권, 임소정 기자 등 4명으로 취재팀을 꾸리고 대전지역 달동네 3~4곳에 대한 현지답사 등을 거쳐 ‘대전시 대동 산 1번지’ 일대를 취재지역으로 정했다. 달 동네라는 어감이 괜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보고 ‘하늘과 가장 가까운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의미에서 ‘하늘동네’로 이름 붙였다. 기존 뉴스와는 차별화를 시도하는 차원에서 ‘다큐 멘터리 기법을 도입한 뉴스’라는 뜻으로 ‘다큐뉴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제목을 붙였다. 회사 내 설득도 순조로웠다. 당시 보도국장이던 권흥순 국장께서 흔쾌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용해주셨고, 예산작업에도 힘을 보태셨다. 2009년 1월부터 매주 한 차례씩 뉴스를 내보 내고, 1년 치 뉴스방송분을 묶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결정됐고, 예산도 세웠다. 해당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진행할 설문조사 비용 등을 포함해 1천5백만 원, 액수의 크고 작음을 떠나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다큐뉴스’ 하늘동네 이야기는 그렇게 시 작됐다.
차가운 시선… 그리고 그 시선 뒤에 숨은 아픔
2009년 1월부터 시작된 뉴스는 현장을 발로 뛰며 만들어냈다. 특히 고병권, 임소정 기 자의 노력이 컸다. 하지만 당초 예상보다 주민 반발이 심각했다. 빈곤과 실업, 고령화와 질병, 가족 해체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스며 있는 하늘동네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 이어지자 일부 주민들이 취재를 거부하는 등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설득했다. ‘동네에 분명히 밝은 변화가 생길 것이다.’, ‘다시 힘을 합치면 일어설 수 있다.’고 취재팀 전원이 목이 메며 호소했 다. 등을 돌린 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높은 언덕길과 가파른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 르내렸다. 한 겨울이었지만 등줄기는 땀으로 흥건했다. 하지만 취재팀의 마음 아프게 한 것 은 주민들의 차가운 시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숨겨온 상처 때문이었다. 설문조사 결과 드러난 극심한 우울 증세, 일그러진 아이들의 심리 상태는 충격 그 자체였다. ‘방송 사상 최초 진단’이라는 기사적인 가치보다 그들의 생채기를 애써 들춰냈다는 그 미안함이 마음을 옥죄어 왔다.
슬픔, 웃음, 감동 하지만…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이 흘러갔다. 하늘동네 주민들의 아픔이 하나, 둘 소개됐고 그 아픔을 치유해줄 구체적인 방법으로 가족 결연 프로젝트와 희망기금 조성, 아동심리치료 등 다양한 프로젝트가 막 진행되기 시작했다. ‘지역의 문제는 우리 지역 내에서 해결하자’는 취지로 지역 내 각급 기관 단체와도 손을 맞잡았다. 그 사이 주민들의 마음도 서서히 열려갔다. 특히 취재 초기 촬영을 극구 거부하던 하늘동네 공부방 아이들이 고병권, 임소정 기자와 어울 리며 얼굴을 트기 시작했다. ‘잘만 된다면 정말 획기적인 보도가 될 거야’, 취재팀 모두 모든 일이 순조로울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호사다마는 예외가 없었다.
첫 고비가 시작됐다. 너무 새로운 시도였던 것일까? 석 달 정도 다큐뉴스가 진행되면서 사내 모니터에서 악평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나도록 ‘왜 똑같은 내용만 되풀이 하느 냐?’, ‘그 사람들 못살고 불행한 거 다 안다. 왜 한 얘기를 또 하느냐?’라는 식의 얘기였다. 참 답답했다. 1년짜리 장기 프로젝트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안 되는 건지, 원망은 커져갔다. 내용을 좀 더 보강하고, 구성도 바꿔보고, 대안 일부도 소개해 봤지만 모니터들의 혹평 경쟁은 더 가혹해져만 갔다. ‘왜 시작했나?’라는 푸념과 후회 속에 몇 달이 또 흘러갔다. 더 큰 고비가 똬리를 트고 있을 줄을 생각지도 못했다.
“하늘동네 우리 아이들 보고 싶어서 어쩌죠? 선배님?”
2009년 7월, 하늘동네 취재팀에 사실상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뉴스 경쟁력 강화의 명분 아래 하늘동네 팀이 해체된 것이다. 고병권, 임소정 기자는 경찰 팀으로, 이교선 기자는 행정팀으로, 필자는 교육팀으로 배치됐다. 너무 많은 인력이 하늘동네 이야기에 투입되다보니 사건사고 등 기존 뉴스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팀 해체의 이유였다. 하늘동네 이야기 를 지속하려면 혼자서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절반 밖에 오지 못한 길, 멈춰 설 것 인가? 서러움과 분노가 교차했다.
팀이 해체되던 날, 출입처 개편을 통해 새롭게 일을 해보자는 차원의 보도국 단합대회가 열렸다. 한참 의기소침해 있던 필자에게 누군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가왔다. “하 늘동네 우리 아이들 보고 싶어서 어쩌죠? 선배님?”, 바로 임소정 기자였다. ‘우리 아이들?’, 그 만큼 애착이 많아진 모양이다. “이제 많이 정들었는데, 보러 가지도 못하게 됐어요. 엉 엉.”, 이번엔 아예 대성통곡이다. 닭똥 눈물에 놀라 우물쭈물하던 필자 옆으로 고병권, 이교선 기자가 다가왔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 있으면, 하늘동네 이야기 마무리될 때까지 돕겠습니다. 계속 하시죠.”라며 거들었다. 그것도 의지에 불타는 눈동자들을 하고서 말이다. 권유가 아니라 명령처럼 느껴졌다. 닭똥 눈물과 불타는 눈을 보면서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꼭 극복할 의지와 힘이 함께 온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매고… 희망의 하늘동네로
반 년 간 후배들이 쏟은 땀과 열정이, 주저앉을 뻔한 ‘하늘동네 이야기’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제 혼자다. 하지만 후배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힘들수록 더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여러 가지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다 보니 혼란스러움이 많았지만 그동안 쌓아온 일들을 실타래 다루듯 하나, 둘 풀어나갔다. 미뤄뒀던 지미짚 촬영도 시작하고, 한 여름 무더위 속 에 달동네 골목길을 누비며 비지땀을 쏟았다. 다른 언론사 선후배의 격려도 큰 힘이 됐다. ‘힘들겠지만 그런 뉴스가 꼭 필요해, 열심히 하면 내년에 상 많이 탈 것 같다. 조금 더 고생해.’ 라던 TJB 선배님, 다른 리포트 때문에 하늘동네를 찾았다가 우리 취재팀을 만나서 ‘하늘동네 이야기 너무 좋아요. 선배님 멋지던데요.’라고 응원하던 KBS 후배, 너무 감사했다. 결실의 계절이 가을이 오자, 하늘동네에도 풍성한 수확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그림 좋은 이야깃거리가 생겨난 것이다. 지역봉사단체인 대전 소롭티미스트 정선주 건축사님과 함께 진행 한 집수리, 한예술치료교육연구소 오선미 교수님과 함께 했던 하늘동네 벽화 그리기 등 주변 의 도움을 통해 각종 프로젝트들이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절로 힘이 나고, 신이 나고, 흥이 났다. 9월말쯤부터 사내 모니터의 평가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해 하늘동네 희망프 로젝트 추진 이전과 이후 화면을 모아 방송을 하면서 부터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왜 그리 조급하게 비판하셨나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스스로 일어난 주민들… 땅에서, 꽃에서, 자신들의 손에서 희망을 보다
하늘동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초점을 맞춘 것은 주민들 스스로의 변화였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립의 의지를 갖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드디어 주민들 스스 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하늘동네 영농사업단은 배추밭을 일궈 땅에서 희망을 찾았고, 일이 없던 주부들은 꽃누르미, 이른바 압화 사업단을 통해 자립에 성공했다. 일용직 건설인부로 근근이 버텨오던 하늘동네 아저씨들은 ‘수리수리 둥지’라는 집수리 사업단을 결성했다. 지역 내 어려운 이웃의 집을 저렴하게 고쳐주고 최소한의 수고비만 받는 조직이다. 하늘동네의 열악한 주거환경이 개선되는 것은 물론 일이 없던 사람들이 지속적인 일자리를 갖게 됐다. 다양한 희망 프로젝트를 통해 우울함이 가득했던 주민들의 마음에서도 긍정의 힘이 솟아난 것이 다. 1년 가까이 진행된 심리치료와 놀이치료 등을 통해 하늘동네 아이들의 얼굴이 밝아진 것 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였다. 황폐하기만 했던 아이들의 마음이 포근해지고, 자아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2009년 12월, 아이들은 하늘동네 취재팀에 손수 적은 편지를 보내왔다.
김선화  (하늘동네 지역아동센터) “우리에게 잘 대해 주시고, 슬플 때는 MBC 아저씨들이 웃겨주셔서 좋았어요. MBC 아저 씨들 사랑해요. 너무너무 감사해요. 힘들 때도 파이팅, 슬플 때도 파이팅, 항상 웃으세요.”
이진아  (하늘동네 지역아동센터) “아저씨들을 만나고 나서부터 더 많이 웃게 된 것 같아요. 평소보다 많이 웃게 해주셔서 감 사합니다. 다음에 또 만나면 서로 인사할 수 있죠? 저희들을 안 만나도 절대로 잊지 마세요.”
김소담  (하늘동네 지역아동센터) “집이 바뀌어서 뭐가 좋으냐고 물었을 때 대답을 못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따뜻하고 예뻐서 집에 빨리 가고 싶고 그래요. 너무 좋아요.”
잊지 않겠습니다. 아니,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도시의 고립된 섬, 전국의 모든 ‘절망의 달동네’가 ‘희망의 하늘동네’가 되길 기원한다. 이제 시련과 아픔을 털어내기 시작한 하늘동네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기억이 될 것이다.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들이 진정 높이 사는 그 날까지, 하늘 동네 그 희망의 기록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1년 간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하늘동네 이곳저곳을 누빈 김준영 카메라기자와 이동훈 오디오맨, 힘겹게 발품을 팔며 어려운 취재를 해냈던 이교선, 고병권, 임소정 기자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또한 하늘동네 첫 희망기금 전달자이자 아동들의 심리치료지원비와 여행경비 등을 후원해주신 신화금속 정찬욱 사장님, 하늘동네 집수리사업단을 있게 해 주신 소롭티미스트 정선주 건축사님, 달동네도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 고 여전히 하늘동네를 사랑하시는 한예술치료교육연구소 오선미 교수님, 하늘동네 주민들의 중심에서 어려운 일을 도맡고 계시는 대동종합사회복지관 김현채 관장님, 신종근 과장님, 장승미 과장님 등 사회복지사 분들, 다양한 희망 프로젝트에 함께 해주신 한국수자원공사와 충 남도시가스, 대전시 관계자 여러분에게도 깊은 감사를 올린다.